요즘 주총 시즌을 맞아 언론에 ‘스튜어드십 코드’가 자주 거론된다. 국민연금 같은 기관투자가들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주주 권리를 보호하고, 투자 기업의 장기적 이해를 지키는 ‘청지기(steward)’ 역할을 하기 위한 행동지침이 스튜어드십 코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금융사와 대기업의 주인인 주주와 전문경영인 간의 이해 상충, 즉 ‘대리인(agent)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됐다. 주주보다 기업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는 전문경영인이 임기 문제로 단기성과에 집착하면서 기업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 스튜어드십 코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원인 중 하나가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의 단기투자 때문이라는 반성 속에 2010년 영국에서 처음 도입한 이후 20여 개국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 압박 수단으로 변질하는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공정경제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책임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를 통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말한 뒤부터다.
□ 이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주총에서 잇따라 ‘반대’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국민연금은 올해 들어 지난 주말까지 20여개 기업의 주총에서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지만,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로 주총 안건이 부결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국민연금의 반대 의견에 긴장하던 기업들도 이제는 잔소리 정도로 여기는 지경이다. 정부의 압박에 국민연금이 ‘보고용’으로 반대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민 노후를 지킬 국민연금이 청지기가 아니라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것이다.
□ 이제 이목은 27일 대한항공 주총에 쏠린다. 국민연금은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이사 재선임을 막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25일 현대엘리베이터 주총에서 현정은 회장의 이사 선임에 기권하기로 한 점이 변수다. 배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현 회장 선임은 기권하면서, 횡령ㆍ배임 등 혐의로 재판 중인 조 회장 선임을 반대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제대로 정착하려면 기금운용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이 선행돼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무서워하고, 국민 노후도 제대로 지킬 수 있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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