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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ㆍ서점ㆍ수영장… 머무르는 곳에 대한 줌파 라히리의 짧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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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ㆍ서점ㆍ수영장… 머무르는 곳에 대한 줌파 라히리의 짧은 단상

입력
2019.03.21 18:00
수정
2019.03.21 19:1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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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네 권의 책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인으로서 겪은 주변인의 경험을 보편서사로 끌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왔다. 마음산책 제공
단 네 권의 책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인으로서 겪은 주변인의 경험을 보편서사로 끌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왔다. 마음산책 제공

“먼 곳에의 그리움! 모르는 얼굴과 마음의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

독일 뮌헨의 유일한 동양인 유학생이었던 작가 전혜린은 일찍이 이국에 대한 문학적 동경을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라고 표현한 바 있다. 오늘날 가장 성공한 미국 작가 중 한명인 줌파 라히리 역시 비슷한 동경을 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작가로서 익숙할 뿐만 아니라, 퓰리처상을 안겨줄 정도로 성공적으로 완수한 언어인 영어를 버리고 어느 날 이탈리아어 공부에 뛰어든다. 완전히 낯선 언어에 매혹되고, 발견하고, 공부하고, 탐색한 끝에 이탈리아어로 소설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담아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책이 입은 옷’을 써 낸 그가 마침내 ‘이탈리아어’ 작가로 거듭났다.

‘내가 있는 곳’은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첫 소설이자 2013년 출간된 장편소설 ‘저지대’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소설은 한적한 바닷가 도시에 사는 40대의 고독한 미혼 여성이 길, 사무실, 박물관, 수영장, 서점, 병원, 슈퍼마켓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 머무른 짧은 단상으로 이뤄져 있다.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ㆍ이승수 옮김

마음산책 발행ㆍ200쪽ㆍ1만 3,500원

그가 머무르는 곳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어느 동네인지를 알려 주는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머무르는 곳 역시 단순히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봄’ ‘겨울’ ‘새벽’ ‘8월’ 같이 시간과 계절을 의미하기도 하고, ‘마음 속’ ‘전화 통화’처럼 특정 상황을 일컫기도 한다.

새로운 언어로 쓰고 말한다는 것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소설은 이야기의 서사성보다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작가가 느끼는 감상과 주변에 대한 묘사에 집중한다.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느꼈던 결핍과 불안, 한 곳과 한 사람에 정착하지 못했던 성향,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고독이 여러 장소와 상황에 겹쳐지며 끝없는 사색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물은 끝에 “결국 환경 곧 물리적 공간, 빛, 벽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각각의 단상이 한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라히리는 전작에서 뛰어난 관찰력을 밑바탕으로 이민자들의 삶과 인물간의 미묘한 갈등을 포착해 조밀한 세계를 축조했다. 그런 라히리를 사랑해 온 독자라면 문장 간 여백과 투박한 표현들이 성기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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