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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연예인의 성관계 장면을 동의 없이 촬영한 불법 동영상이 퍼진 2000년, 나는 사회부 경찰팀 기자였다. 선배가 남성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구해 와.” 며칠 뒤 경찰팀 공용 데스크톱 바탕화면에 그 동영상이 깔려 있는 걸 봤다.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한 친구가 말했다. “나도 보자.”
그렇게 후진 시절이었다. 후진 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정준영 사건을 지켜 보며 사람들은 그가 몰래 찍었다는 성관계 동영상을 궁금해했다. 궁금함을 애써 참지 않았다.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에 ‘정준영 동영상’이 올랐고, 한동안 내려갈 줄 몰랐다. 정준영 얼굴을 합성한 가짜 포르노와 정체 불명의 피해자 명단이 돌아다녔다.
참담한 사실을 발견했다. 불법 촬영 피해자의 고통은 여전히 사소한 존재라는 것. 분노는 더 큰 악을 향해야 하므로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을 ‘섹스 몰카’ 따위가 가려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글을 넘치도록 봤다. 성폭력 피해자가 충분히 피해자다운가를 캐물은 사람들은 이제 가해자가 충분히 권력자인가를 따진다. 폭력의 고통에 등급을 매기는 이중 폭력이다. 한류 피해를 걱정하는 기사, 정준영처럼 스마트폰 수리를 맡겼다 망신당할지 모른다고 호들갑 떠는 기사도 지겹게 봤다.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누군가 성폭력 처단을 조개 줍는 일에 빗댔다던가. 변함없이 유죄는 조개다.
불법 촬영 피해자가 되는 것이 정말로 사소한가. 그 사소함의 누명을 쓰고 누군가는 죽는다. 어쩌면 나는 이미 불법 촬영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용변 보는 영상이 ‘고화질-합정역 화장실녀’ 같은 제목을 달고 돌아다니고 있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내 치마 속 사진을 수천 명이 돌려봤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피해자임을 확인하고도 씩씩할 거라고, 죽음 같은 건 떠올리지 않을 거라고 말할 자신이 나는 없다. “울지 마 지워 줄게, 죽지 마 지켜 줄게, 우리가 싸워 줄게.” 지난해 서울 혜화동에서 열린 불법 촬영 엄단 촉구 집회에서 누군가 치켜든 피켓은 과장 없는 절규였다.
그 죽음이, 죽음 같은 고통이 누군가에겐 유희다. 피해자가 목숨을 끊으면 ‘유작’으로 분류돼 동영상 가격이 올라간다고 한다. 사냥감이 고통으로 몸부림칠수록 사냥의 희열이 치솟는 심리라고 한다. 그 죽음은 종종 ‘없는 죽음’이 된다. “나는 그런 거 안 봐. 과장하지 마.” 내가 모르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란 말인가. 여성들은 다 겪는데 남성들은 왜 없다고 하는가. 대한민국엔 정준영의 동족 괴물이 많다. 괴물의 피해자는 수없이 많다. 불법 촬영이 산업으로 존재하는 게 명명백백한 증거다.
법도, 법 집행자들도 그러나 그 죽음에 무심하다. 성폭력 앞에서 법은 돌연 관대해진다. 약자를 제물 삼은 강자의 쾌락이 면죄부를 받는다. “난 쓰레기야.” 정준영이 자랑스럽게 했다는 말이다. 여성 착취에 관한 한, 쓰레기처럼 악랄해져도 괜찮다. “강간하자”는 말을 산책하자는 말처럼 해도 괜찮다. 불법 촬영을 ‘몰래’라는 귀여운 말로 수식해도 괜찮다. 가해자의 욕정에 죄를 물어도 괜찮고, 부실 수사를 해도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
2000년의 그 연예인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빚었다”며 기자들 앞에서 사과했다. 버텨내겠다고 했다가 뻔뻔하다고 손가락질당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니 다행인가. 그렇게 위안하며 점잖게 세상을 바꾸기엔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인격이, 목숨이 살해당하고 있다. 대법원이 올해 불법 촬영 성폭력의 양형 기준을 손본다고 한다. 불법 촬영을 살인에 준해 처벌하라. 불법 촬영으로 누구의 인생이 끝나야 하는가를 똑바로 결정하라. 호소한다. 나는, 우리는 몸이 아니다. 인간이다.
최문선 문화부 순수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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