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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맛빠기! 인도네시아] 당첨 확률 0.9%, 인도네시아의 자부심에 몸을 싣다

입력
2019.03.21 04:40
수정
2019.04.03 20:4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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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심고속철도(MRT)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리나(앞줄 왼쪽)씨와 디아(앞줄 오른쪽)씨가 18일 자카르타 MRT 무료 시승 행사에 함께 온 계원들과 행복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리나(앞줄 왼쪽)씨와 디아(앞줄 오른쪽)씨가 18일 자카르타 MRT 무료 시승 행사에 함께 온 계원들과 행복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18일 오전 3호 객차 안이 왁자하다. 쪽 빼입은 중년여성들이 좌석 54개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디아(43)씨는 “모두 매달 모여 친목을 다지는 사이”라며 이날을 “특별한 곗날”이라고 했다. 달뜬 수다와 웃음이 떠다니던 실내는 열차가 시속 100㎞로 지하를 벗어나는 찰나 환호로 물들었다. 리나(43)씨는 “인도네시아가 아주 자랑스럽다(very proud of Indonesia)”고 했다. “우리도 드디어 새로운 것(new things)을 갖게 됐어요.” 디아씨가 거들었다.

한 소녀가 18일 자카르타 MRT 열차 안에서 가족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한 소녀가 18일 자카르타 MRT 열차 안에서 가족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열차 칸마다 다들 촬영삼매경에 빠져있다. 아이들 손을 잡은 부모도,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는 남성도, 친구와 방방 뛰는 젊은이도, 좌석 위로 올라선 소녀도 당장을 잡아둘 새라 휴대폰 촬영버튼을 연신 눌렀다. 대학생 아플레로(22)씨는 “깨끗하고 시원하고 현대적”이라고 추켜세웠다.

'기다리지 말고 자카르타 MRT 무료 시승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온라인 신청 메뉴. 모바일캡처
'기다리지 말고 자카르타 MRT 무료 시승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온라인 신청 메뉴. 모바일캡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첫 선을 보인 도심고속철도(MRT)의 무료 시승행사(12~24일)는 덜컹거리는 축제였고, 달리는 스튜디오였다. 온라인 신청 첫날인 5일 4,000명이던 시승 희망자는 소문이 나면서 일주일 만에 약 20만명으로 폭증했다. 기자가 수 차례 시도 끝에 18일치 표를 구한 15일 이후에는 모든 날짜가 동났다. 막차에 올랐던 셈이다. 수혜자는 28만5,600명. 우리나라 수도권처럼 자카르타와 인근 생활권 도시를 아울러 일컫는 ‘자보데타벡(jabodetabek)’ 인구가 3,168만9,592명인 걸 감안하면 0.9%만 누린 행운이다.

무료 시승 티켓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온라인 신청 메뉴. 모바일 캡처
무료 시승 티켓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온라인 신청 메뉴. 모바일 캡처

공짜 손님을 받기 전만 해도 “그걸 누가 타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잇따른 공사 중단, 소음 및 교통체증 가중, 안전 사고, 오락가락 계획 변경, 비싼 요금 등 MRT는 태생부터 천덕꾸러기였다. “그 위험한 걸 누가 타냐” “그 비싼 걸 누가 타냐” “일정이 수시로 바뀌는 걸 누가 타냐” 식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자카르타 대중교통 운임. 강준구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자카르타 대중교통 운임. 강준구기자

현 정부가 치적으로 내세우려고 개통 일정을 다음달 17일 대선 전으로 무리하게 앞당겼다는 의혹까지 더해졌다. 실제 MRT 철로가 지나가는 지역은 여전히 공사가 한창이다. 꽉 막힌 도로에 묶여 보고 있자면 ‘저것 때문에 더 밀리는구나’ 하다가 가끔 현장이 위태로워 보여서 ‘개통을 해도 되는 건가’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누가 타는지 더 궁금했다.

18일 자카르타 MRT 열차 안으로 들어서며 친구에게 포즈를 취하는 젊은 여성.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18일 자카르타 MRT 열차 안으로 들어서며 친구에게 포즈를 취하는 젊은 여성.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오전 8시 집에서 가까운 파트마와티역에 들어섰다. 남쪽 종점 르박 불루스역 전 역이다. 시승 구간은 북으로 호텔인도네시아까지 이어진다. 남쪽부터 7개는 지상, 이후 6개는 지하 구간이다. 몸 수색을 거친 뒤 개표구 앞에서 온라인 티켓(QR코드)을 보여주자 동그란 스티커를 붙여줬다. 공사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역사 안 곳곳이 어수선했다. 출근 시간이라 직장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고, 미취학 자녀와 함께 온 부모들도 눈에 띄었다.

자카르타 MRT 안내원이 18일 개표구 앞에서 무료 시승 손님에게 스티커 티켓을 붙여주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 MRT 안내원이 18일 개표구 앞에서 무료 시승 손님에게 스티커 티켓을 붙여주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오전 8시22분 MRT가 스르르 밀려왔다. 미끈한 몸매에 작은 탄성들이 터졌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열차 안은 신상품 모습 그대로 세련되고 시원하고 쾌적했다. 한국 지하철과 엇비슷하다. 체감속도가 우리 지하철보다 빨라서 속도를 물었다. 안전요원 파가르(26)씨가 “시속 200㎞”라고 해서 확인했더니, 관련 자료에는 지하구간 시속 100㎞, 지상구간 시속 80㎞라고 적혀있다.

쾌속은 직장인에겐 축복과 같다. 특히 자카르타에선. “운 좋게 두 번째 시승했다”는 아리스(34)씨는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최소 1시간30분 걸리던 출근시간이 MRT 덕에 20분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파메사(41)씨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이용할 것”이라며 “시간이 돈보다 귀하다”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현재 거론되는 찻삯은 10㎞당 8,500루피아(680원). 직장인들의 발로 불리는 통근열차(KRL)나 버스보다 3배 가까이 비싼 가격이다.

MRT 열차가 18일 오전 파트마와티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MRT 열차가 18일 오전 파트마와티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이날 속도를 맛본 이들은 “이 정도라면 기꺼이 돈을 내겠다”고 입을 모았다. 열차는 자카르타 남부에서 중심부까지 15.7㎞를 25분만에 주파했다. 한번 발이 묶이면 기본 1시간, 두세 시간을 도로에 갇히기도 하고, 비라도 쏟아지면 속된 말로 ‘답이 안 나오는’ 교통 지옥 자카르타에서 MRT는 일단 천국의 계단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는 MRT를 타지 않겠다는 답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사뭇 다르다.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 대통령을 싫어하는 쪽은 MRT에 조코위를 투영시키기도 한다. 한 수입업자는 “수입관세를 높인 조코위 때문에 사업이 안 된다. MRT는 절대 안 탄다”고 못박을 정도다. 약한 지반, 지진 발생 가능성, 해수 범람 등으로 지하철은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역시 MRT를 꺼려한다. 조코위 대통령은 기자가 다녀간 다음날인 19일 MRT를 탔다.

19일 MRT 시승 행사에 참가한 조코 위도도(가운데) 인도네시아 대통령. 자카르타=EPA연합뉴스
19일 MRT 시승 행사에 참가한 조코 위도도(가운데) 인도네시아 대통령. 자카르타=EPA연합뉴스

종점에서 다시 종점으로 열차를 갈아타는 사이 6량짜리 객차 모두를 가득 메울 정도로 사람들이 불어났다. 긍지로 단장한 얼굴, 자신감을 마이크 삼은 목소리가 넘쳐났다. MRT 운행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이날 MRT에 몸을 실은 인도네시아인들은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다만 MRT 역사를 빠져 나오자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서 내려 동쪽 한국일보 특파원 사무실로 가기 위해 그랩(Grab) 오토바이에 오른 기자 입장에선, 아직은 남북으로 1단계만 깔린 MRT 노선의 단조로움과 연계 교통수단의 부족은 아쉬웠다. 일부 동승자는 MTR를 계속 깨끗하게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디아씨 계원들이 표현한 ‘신세계(New World)’는 25일 정식으로 열린다.

18일 MRT 무료 시승 행사에 참가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자카르타 시민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18일 MRT 무료 시승 행사에 참가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자카르타 시민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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