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결국 파행에 이르렀다. 경사노위는 크게 두 가지 과제가 있는 조직이었다.
첫째는 사회적 대화의 경험과 발전이다. 사회적 대화는 관련 있는 당사자들이 두루 참여하여 충분한 발언과 숙의를 거쳐 결론에 이르는 의사결정을 말한다. 사회적 대화라고 하니 막연한 일상어 같은 착시가 있지만, 사실 이는 그저 잘 얘기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국제노동기구의 협약이나 권고, 유엔 권고, FTA와 같은 외교통상 문서에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둘째는 노동현안에 대한 합의다. 경사노위는 출범할 때부터 탄력근로제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그 외에도 노동관계법 개정 및 정비, 여성이나 연령 차별 등 여러 당사자가 애써 참가하는 만큼 다룰 수 있고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많았다.
지금 경사노위는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성원이 안 된다. 처음부터 불참을 결정했던 민주노총에 이어, 여성, 청소년, 비정규직 대표들도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에, 근로자 대표 중 절반 이상이 출석해야 하는 의결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합의에 노동자 대표들이 어깃장을 놓고 있다고 비판하기는 쉽다. 실제로 그런 비판이 있기도 하다. 깽판만 놓으면 다냐는 원색적인 비난부터, 이번에는 정부가 의지가 있고 뭔가 될 수도 있는데 노동자들이 강성 대응하고 있다는 쉬운 평까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는 왜 굳이 불참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경사노위의 과제에 비추어 정당하지 않다.
지금 경사노위는, 그 파행까지 포함하여, 우리 사회가 사회적 대화라는 새로운 의사결정 과정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사회적 대화의 유일한 목표는 합의문이 아니다. 합의하여 참여한 당사자들 간의 이견을 좁히고 좋은 결론을 내는 것이 목표이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견이 잘 좁혀지지 않는 과정을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 것 또한 목표다. 그것이 기계적 다수결이나 관료제가 아니라 사회적 대화라는 의사결정 과정의 차이이기도 하다.
사회적 대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다. 토론을 하자고 일단 모여 앉았다가도, 편을 나누어 토론을 한 다음에는 목소리가 큰 사람을 따르든, 권력이 더 센 사람을 따르든, 기계적 다수결을 하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일이 많다. 결론이라는 성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 쫓기고,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는 시간에 쫓기고, ‘토론’을 파토내면 안 된다는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에 쫓긴다. 이 너무 급한 사냥 중에 먼저 잡히고 주저앉는 쪽은 당연히 더 약하고 더 아쉬운 구성원들이다. 노동 이슈에서 이는 대체로 노동자 측이었다. 역사적 경험 때문에 약자들이 갖는 공적 절차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은 노동자 대표들의 문제가 아니다.
경사노위는 이 모든 장애물들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애당초 합의할 사항이 아닌 것까지 사회적 대화의 ‘주제’로 선정한 것은 아닌지, 정해진 답을 위한 거수기 노릇을 한다고 느끼는 참가자가 있지는 않았는지, 있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은근히 어떤 방향의 정답이 있지는 않았는지 고민해야 한다. 18명 경사노위 위원 중 일부가 불참으로 의결정족수를 무산시키기로 결정한 결과 자체는 아직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대화 시도에 따른 어떤 중간 결론이다. 사회적 대화를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 제도로서의 의사결정에 녹여 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진통이다.
우리는 아마 이 진통을 앞으로도 여러 번 겪어야 할 것이다. 익숙하지 않더라도, 대화의 장을 섣불리 닫지 않고 기다리고, 공정한 대화의 장을 만들려는 시도도 여러 번 해야 할 것이다. 대화의 중단조차도, 그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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