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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밀조밀 ‘작은 한양’…1000년 기품이 어디 가랴

입력
2019.03.19 18:22
수정
2019.03.20 13: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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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한양’이라 불리는 나주는 광주에 주도권을 빼앗긴 후 쇠락을 거듭해 왔다. 나주읍성 서성문 주변은 1~2층 건물에 좁은 골목으로 연결돼 시골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나주=최흥수기자
‘작은 한양’이라 불리는 나주는 광주에 주도권을 빼앗긴 후 쇠락을 거듭해 왔다. 나주읍성 서성문 주변은 1~2층 건물에 좁은 골목으로 연결돼 시골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나주=최흥수기자

무언가 어수선하고 들떠 있었다. 나주 여행의 출발점, 금성관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주차장엔 차가 가득했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별로 없고, 2층 누각 정수루는 넓은 주차장과 차도에 포위돼 왠지 제자리를 잡지 못한 듯 보였다. 지방 관아의 객사로는 가장 커 ‘작은 한양’을 상징한다는 금성관만 잠시 둘러 볼 요량이었는데, 묵은 때를 벗는 나주읍성의 매력에 끌려 결국 예정에 없던 여정이 되고 말았다.

◇’작은 한양’의 중심 금성관과 나주읍성

2018년은 ‘전라도’라는 명칭이 정해진 지 1,000년이 된 해였다. 전라도는 고려 현종 9년(1018) 당시 큰 도시였던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지나친 상업화로 옛 모습을 잃었다는 비판이 많지만, 어쨌든 전주가 한옥마을을 내세워 관광지로서 입지를 굳힌 데 비해 나주는 광주의 주변 도시로 쇠락을 거듭해왔다.

나주읍성의 객사인 금성관은 지방 객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나주읍성의 객사인 금성관은 지방 객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금성관은 궁궐처럼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의 구조를 갖췄다. 외삼문인 망화루에서 본 중삼문과 금성관 풍경이다. 내삼문은 터만 남아 있다.
금성관은 궁궐처럼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의 구조를 갖췄다. 외삼문인 망화루에서 본 중삼문과 금성관 풍경이다. 내삼문은 터만 남아 있다.

나주읍성의 중심은 나주목(牧) 관아의 객사 금성관(錦城館)이다. 금성관은 다른 고을 객사와 비교하면 웅장할 정도로 크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내삼문, 중삼문과 외삼문을 갖춰 궁궐 같은 짜임새를 갖췄다. 복원한 외삼문에서 금성관으로 한 걸음씩 옮기면 흡사 경복궁 근정전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소경(小京), 즉 ‘작은 한양’이라는 자부심이 괜한 허세가 아니다. 이유인 목사(1487~1489년 재임)가 지은 금성관은 중수와 개수를 거쳐 1976년 전면 해체 복원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복원한 문화재는 당시의 기술 수준과 예술적 안목이 반영된다. 금성관 바로 앞에 서면 언뜻 사찰의 대웅전과 흡사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도 뒤뜰의 두 그루 은행나무의 자태는 여전하고, 최근엔 객사 동편에 연못자리를 복원해 격식을 갖춰가고 있다.

나주객사 금성관의 외삼문인 망화루. 바로 앞이 나주곰탕거리다.
나주객사 금성관의 외삼문인 망화루. 바로 앞이 나주곰탕거리다.
공중에서 본 금성관 주변 풍경.
공중에서 본 금성관 주변 풍경.

금성관을 나오면 외삼문인 망화루(望華樓)와 정수루(正綏樓), 2개의 누각이 세트처럼 이웃하고 있다. 객사나 동헌 앞 누대는 공공행사를 치르거나 국가 정책을 선포하는 용도인데 작은 고을에는 1개, 큰 고을에는 2개를 세웠다. 망화루는 서울을 바라본다는 의미이고, 정수루는 갓끈을 단정하게 맨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 임금을 대신해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되새기는 이름이다. 정수루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는 나주목사의 내아(안채)인 금학헌(琴鶴軒)이 자리잡고 있다. ‘비파와 학’ 역시 관리의 청렴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ㄷ’ 자 모양의 한옥 건물은 앞 부분만 이중 처마로 처리해 검소하면서도 최소한의 격식을 차렸다. 1980년대 후반까지 실제 나주군수가 숙소로 사용했고, 지금은 나주목사로서 선정을 베푼 학봉 김성일(1583~1586년 재임), 독송 유석증(1610년, 1619년 부임)의 이름을 딴 방을 고택 민박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주목사 내아인 금학헌 입구.
나주목사 내아인 금학헌 입구.
전국 향교 중에서도 온전한 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나주향교.
전국 향교 중에서도 온전한 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나주향교.
나주향교 명륜당 앞 비자나무.
나주향교 명륜당 앞 비자나무.

금성관과 함께 나주향교도 ‘작은 한양’을 대표한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나주향교는 한 번도 화재를 당하지 않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울의 성균관이 화재로 소실된 후 나주향교를 본받아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강학당인 명륜당과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인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옛모습 그대로고,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까지 복원해 전국의 향교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 대성전 앞 은행나무와 명륜당 비자나무가 500년의 기품을 은은하게 풍기고, 여기에 사마재(司馬齋)까지 더하면 일대가 고즈넉한 한옥 마을과 다름없다. 사마재는 생원과 진사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이 공부하던 장소다. 향교 입구에는 여러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에 성종3년(1472)년 문과에 급제한 박성건의 ‘금성별곡’을 새긴 비는 나주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금성별곡은 그의 제자 10명이 한꺼번에 소과에 합격한 기쁨을 노래한 경기체가다.

◇전라도 1000년 정겨운 ‘고샅길’

나주시는 최근 읍성의 사대문(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을 복원했다. 장기적으로 3,520m에 달하는 성곽은 낮은 울타리 형식으로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렇다 할 큰 건물이 없기 때문에 나주읍성 안의 풍경은 시골 정취를 물씬 풍긴다. 도로도 골목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나주시는 읍성 걷기 길에 ‘고샅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샅’은 시골마을의 좁은 골목길이라는 뜻이다.

나주읍성 서성문과 나주향교 주변 풍경. 황토 담장이 많아 분위기가 그윽하다.
나주읍성 서성문과 나주향교 주변 풍경. 황토 담장이 많아 분위기가 그윽하다.
나주향교 주변 황토 담장 골목.
나주향교 주변 황토 담장 골목.

금성관에서 나주읍성의 서문(서성문)과 나주향교에 이르는 구간은 특히 1~2층짜리 낮은 살림집과 가게가 오밀조밀 어깨를 맞대고 있어 정겹기까지 하다. 곧 허물어질 듯한 흙 담장이 있는가 하면, 바스러질 것 같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 색 바랜 기와집들이 뒤섞여 있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묵은 풍경들이 최근에 오히려 가치를 되찾아가고 있다. 골방에 처박아 둔 놋그릇을 꺼내 윤기를 내듯, 황토색 담장으로 둘러진 낮은 주택이 먼지 쌓인 세월을 걷어내고 하나 둘씩 변신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식 주택을 개조한 한정식 식당, 낡은 지붕과 너른 마당을 활용한 커피숍이 들어섰고, 허물어진 채 방치된 집을 개조해 새로운 사업을 해보려는 시도도 보인다. 그렇다고 나보란 듯 튀거나 화려하지 않은 것도 이 동네의 장점이다.

서성문 주변 영업을 준비 중인 엿 가게.
서성문 주변 영업을 준비 중인 엿 가게.
황토 담장 넘어 일본식 2층 가옥. 한정식 식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황토 담장 넘어 일본식 2층 가옥. 한정식 식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나주향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39-17 마중’ 카페는 스러져가는 옛 건물의 정취를 고스란히 살렸다. 카페 명칭은 1939년의 정서를 2017년이 마중 나가 되살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카페 옆 본채는 ‘난파고택’으로 불린다. 1939년 난파 정석진의 손자가 어머니를 위해 당시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건축대서사(건축가) 자격증을 지닌 박영만에 의뢰해 지은 집이다. 한옥의 구들장과 툇마루, 일본식 기와와 창문, 서양식 방갈로를 가미한 특이한 양식으로, 당시 나주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이 한껏 멋을 부린 시험적 저택이다. 지금은 마당에 심겨진 금목서, 은목서에 착안해 ‘목서원’이란 간판을 달고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있다. 난파 정진석은 1894년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나주읍성을 지켜낸 공로로 해남 군수로 제수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듬해 단발령에 반발해 지역 향리들과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가 1896년 동학군이 처형된 나주의 전라우수영에서 참수당한다. 역사의 혼란기에 충효의 대의명분에 따라 행동한 지역 유림의 아이러니를 보는 듯하다. 동학군과 수성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서성문이 보이는 언덕에 그의 호를 딴 ‘난파정’이 있다.

나주향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39-17마중’ 카페.
나주향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39-17마중’ 카페.
’39-17마중’ 카페. 창문 밖 담장 안이 나주향교다.
’39-17마중’ 카페. 창문 밖 담장 안이 나주향교다.
1939년 지은 게스트하우스 ‘목서원’. 당시 나주 최고의 부자가 전문 건축가에 의뢰해 지은 저택이다.
1939년 지은 게스트하우스 ‘목서원’. 당시 나주 최고의 부자가 전문 건축가에 의뢰해 지은 저택이다.

금성관 바로 뒤편은 사창(司倉)거리로 불린다. 줄다리기 줄을 꼬는 데 사용한 커다란 느티나무 뒤로 담장을 마주한 좁은 골목이 이어진다. 나주는 조선시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세곡을 한양으로 올려 보내던 고을이었고, 이곳에는 약 500년 전부터 정부의 양곡 창고가 있었다. 읍성 한가운데 폐허로 남아 있는 ‘나주정미소’는 최근까지도 정부 양곡창고로 쓰였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세운 나주정미소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블록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속살이 드러나는 기와지붕 관리사무소와 일제강점기에 지은 여러 채의 창고 건물이 재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나주읍성의 동문 동점문 밖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돌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석장(石檣)’ 혹은 ‘동문 밖 석당간’으로 부르는데, 나주읍성을 쌓은 후 오래도록 번성하라는 보완 장치로 보고 있다. 나주의 지형이 선박과 비슷해 돛대로 세웠다는 설도 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나주가 번성하길 바라는 뜻은 같다. ‘동국여지승람’에 석장과 목장이 쌍을 이루고 있었다는 기록에 의거해 최근 동문 바로 옆에 목당간도 복원해 놓았다.

나주정미소 사무실 건물. 나주시에서 도시재생사업으로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나주정미소 사무실 건물. 나주시에서 도시재생사업으로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나주정미소는 시내 한가운데 커다란 블록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나주정미소는 시내 한가운데 커다란 블록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나주읍성 동점문 밖 석당간. 나주의 순항을 바라는 돛대의 의미를 품고 있다.
나주읍성 동점문 밖 석당간. 나주의 순항을 바라는 돛대의 의미를 품고 있다.
나주천변 옛 화남산업 통조림 공장. 나주곰탕은 이곳에서 나온 쇠고기 부산물에서 유래됐다.
나주천변 옛 화남산업 통조림 공장. 나주곰탕은 이곳에서 나온 쇠고기 부산물에서 유래됐다.

나주천을 사이에 두고 동점문과 이웃한 (구)화남산업 폐 공장은 ‘나주곰탕’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1926년 일본인 다케나카가 군용 통조림을 생산하기 위해 세운 공장으로, 하루 소 200~300마리를 도축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이 공장에서 나온 부산물은 시장으로 흘러 들었고, 나주곰탕도 여기서 비롯됐다. 요즘의 나주곰탕은 맑은 국물과 양지 수육으로 맛을 내고, 파와 노란 지단으로 색을 더해 나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를 굳혔다. 망화루 앞 나주곰탕 거리는 나주 여행객이면 빠지지 않고 찾는 명소가 됐다.

◇나주 여행 정보

커다란 가마솥에 펄펄 끓고 있는 나주곰탕 국물.
커다란 가마솥에 펄펄 끓고 있는 나주곰탕 국물.
나주곰탕은 잘 익은 깍두기와 썩 잘 어울린다.
나주곰탕은 잘 익은 깍두기와 썩 잘 어울린다.
영산포 ‘홍어1번지’ 식당 홍어정식에 나오는 삼합.
영산포 ‘홍어1번지’ 식당 홍어정식에 나오는 삼합.

▦고속철을 이용하면 서울역에서 나주역까지 약 2시간이 걸린다. 나주역은 나주 시내와 영산포 사이에 위치해 어느 쪽이든 편리하다. ▦금성관 앞에 원조를 내세우는 3개 식당을 비롯해 나주곰탕거리가 형성돼 있다. 아삭한 깍두기 김치를 얹어 먹으면 일품이다. 한 그릇 9,000원. ▦영산포의 홍어식당에서는 홍어정식과 보리애국이 주요 메뉴다. 홍어삼합, 무침, 튀김, 전, 찜에 보리애국까지 포함된 홍어정식의 경우 국내산은 3만원, 수입산은 2만원이다. 홍어 내장 중에서도 간과 보리 싹을 듬뿍 넣어 끓이는 보리애국은 8,000원 선이다. ▦황포돛배는 나주영상테마파크 아래 공산면 다야선착장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석관정까지 왕복 5km, 30분이 소요되며 성인 5,000원이다.

나주=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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