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노인 혐오 넘어… 김혜자가 ‘눈이 부시게’ 일군 세대통합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노인 혐오 넘어… 김혜자가 ‘눈이 부시게’ 일군 세대통합

입력
2019.03.18 18:30
수정
2019.03.19 16:42
21면
0 0

부정 당해 서러운 노인과 청년의 아픔 동시에

“세대 통합 다리”돼 반향도

치매 노인 등 약자의 삶 주체적으로 그려

올해 연기 56년 차 ‘국민 엄마’의 힘

“연기가 곧 나…지금이 좋아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배우 김혜자는 70대 노인의 몸으로 사는 25세 혜자를 연기한다. 그는 19일 종방을 앞두고 “눈부신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셨으면 한다”고 인사를 전했다. JTBC 제공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배우 김혜자는 70대 노인의 몸으로 사는 25세 혜자를 연기한다. 그는 19일 종방을 앞두고 “눈부신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셨으면 한다”고 인사를 전했다. JTBC 제공

“너희한테 당연한 게 우리한테 감사한 거야.” 계단을 힘겹게 오르며 내뱉은 노인의 말은 마디마디가 시리다.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늙어버릴 줄”이란 푸념도 잠시. “에러도 아름다울 수 있어, 오로라처럼.” 백발노인의 입에선 청년이 고단한 현실을 스스로 위로하는 듯한 말이 맴돈다.

노인과 청춘은 요즘 서로 외롭고 아프다. 노인은 노인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외면받아 서럽고, ‘88만원 세대’인 청춘은 세상 본류에 진입하지 못해 슬프다. 19일 종방하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존재를 부정당해 서러운 노인과 청년의 뼈아픈 현실을 실감나게 보여 준다. 노인과 청년이 한 몸에 공존하는 극중 혜자를 통해서다. 혜자는 70대의 몸을 한 25세 청춘이다. 치매로 시간이 뒤엉킨 인물에 노년과 청춘의 삶을 포갰다. 70대의 혜자는 배우 김혜자가, 25세의 혜자는 한지민이 각각 연기한다.

흔해 빠진 ‘시간여행’의 반전

70대 노인이 25세의 인생을 동시에 살며 일깨운 삶의 가치에 시청자는 열광했다. ‘눈이 부시게’는 지난 12일 7.9%(닐슨코리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3.2%로 시작한 지난달 첫 방송보다 시청률이 두 배 이상 뛰었다. 아나운서를 꿈꾸던 25세 혜자가 아버지(안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함부로 사용해 70대 할머니(김혜자)가 됐다는 설정에 막판 반전을 준 덕이 컸다. 애초 ‘눈이 부시게’는 기대작이 아니었다.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남녀의 시간 이탈 로맨스’란 기획 의도를 보고 드라마를 기대하는 시청자는 많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부각하는 ‘타임리프’의 반복을 치매로 인한 시간 여행으로 틀어 새로움을 줬다.

“치매 엄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눈이 부시게’는 노년과 청년을 동시에 품은 혜자를 통해 서로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세대 간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는 셈이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세대 간 갈등을 주로 부각하는 여느 드라마와 달리 ‘눈이 부시게’는 세대의 통합에 무게중심을 둬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약자를 주체적으로 다루는 건 이 드라마의 큰 미덕이다. ‘눈이 부시게’는 치매 노인의 입을 통해 현실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치매를 갈등과 코믹의 소재로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다. 정석희 드라마 평론가는 “치매 노인의 극성이 아닌 치매 노인의 삶과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분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작품”이라고 의미를 뒀다. 실제로 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둔 주부의 감동 어린 사연이 올라와 주위를 먹먹하게 했다. ‘어제 그리고 오늘 그리고 내일, 그후에도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쌔근쌔근 자고 있는 8개월 된 둘째 옆에서 이어폰을 꽂고 흐느껴 울면서 봤다’는 소감이었다.

첫 대본 연습 현장이 웃음바다 된 사연

김혜자는 열연으로 드라마를 빛낸다. 주름진 눈으로 노년의 쓸쓸함을 아리게 우려내다가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청춘의 발랄함도 어색하지 않게 보여 준다. 김석윤 PD는 “김혜자가 아니면 안되는 코미디가 있다”며 “대안의 여지가 없는 캐스팅이었다”고 말했다. 김 PD는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에서 김혜자와 호흡을 맞췄던 인연이 있다.

김 PD의 말처럼 드라마에서 김혜자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제작진은 김혜자를 ‘섭외 1순위’로 두고 드라마를 기획했고, 배역도 그의 실명을 그대로 썼다.

김혜자는 “너희 어그로(관심의 부정적 표현) 끌면 나 간다”는 젊은 세대의 온라인용어도 거침없이 한다. 김혜자는 “말이 느린데 빠르게 하고 목소리도 얇게 해” 청년의 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드라마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드라마 첫 대본 연습 현장은 김혜자로 인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혜자가 1970~80년대 TV CF에서 해 큰 화제를 모은 조미료 광고 대사인 “그래 이 맛이야”부터 퉁명스럽게 “뭐래”란 신세대 어투까지 능숙하게 소화해서다. 드라마 평론가인 박생강 소설가는 “‘눈이 부시게’ 속 김혜자를 보면서 대중문화가 얼마나 노인 캐릭터를 평면적으로 소비했었나란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가출하고 살인하던 ‘국민 엄마’의 새로운 도전

1980년 드라마 ‘전원일기’ 출연 후 30년 넘게 ‘국민엄마’로 불렸지만 김혜자는 똑같은 ‘엄마’를 거부했다. 22년 동안 양촌리 김 회장댁 부인으로 살다 가출(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도 했고, 살인(영화 ‘마더’)도 했다. 1963년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데뷔한 김혜자에게 연기는 “나”였다.

‘눈이 부시게’처럼 김혜자가 시간을 거슬러 25세의 혜자가 된다면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김혜자는 “되돌리기 싫다”고 했다. “지금이 좋아서”란다. 25세 김혜자는 결혼을 해 학업을 포기하고 연기 활동도 접은 상태였다. 김혜자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며 “주어진 청춘을 잘 붙들라”고 작품의 의미를 전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