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17일 “이제는 남북간의 대화 차례”라며 연일 신경전 수위를 높이는 북미간 중재입장을 밝힌 데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북미 대화의 불씨가 사그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북미 모두 ‘일방적 양보는 없다’는 입장을 공표한 상황에서 하루빨리 양측이 수용할 만한 타협안을 도출해야 한다는 판단을 정부가 내렸다는 분석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이날 기자들을 만나 남북 대화 추진 방침을 밝힌 것은 북미간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구축 협상의 적극적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정부가 한반도 협상에서의 역할을 중재자보다 소극적 의미인 대화 촉진자로 축소시켰다가, 북미 협상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다시 한발 나서며 주도적 역할의 각오를 밝힌 셈이다.
정부가 입장을 선회한 것은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불과 2주만에 양측간 긴장이 한없이 고조되는 모습을 두고 봐선 안 된다는 경각심 때문이다. 북한이 지난 15일 최 부상의 기자회견을 통해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까지 거론하며 대미 위협에 나선 가운데, 북미는 실제 어느 채널에서도 대화를 이어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북미 모두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긴 했지만 의지를 밝히는 것뿐, 현재로선 물밑 대화도 완전히 끊긴 상태”라고 전했다. 양측이 쏟아내는 강경발언이 엄포성이 아니라 실제 ‘타협은 없다’는 메시지라면우리 정부라도 나서 조속히 중재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계산이 섰다는 것이다.
문제는 북미가 비핵화와 상응조치에 대해 현격한 시각차를 보이는 상황에서 정부가 어떤 타협안을 도출할 수 있느냐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은 북미 협상의 ‘엔드스테이트’(end stateㆍ최종상태)로서 대량살상무기(WMD)를 포함한 비핵화의 재정의와 더불어 여기에 이르는 로드맵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북측은 비핵화의 최종 목표 상정을 거부한 채 일단 영변 핵시설 폐기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5가지 해제를 통해 신뢰를 쌓은 후 다른 비핵화 협상에 임하겠다는 태세다. 포괄적 합의(미국)와 부분적 합의(북한)사이 타협책을 찾지 않는 이상 대화 재개가 불가능한 것이다.
구체적인 안까지 공개되진 않았으나 청와대는 일단 비핵화 최종목표가 필요하다는 미국 주장에 무게를 싣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북미가 비핵화 엔드스테이트에 대한 개념은 공유하고 있지만 최종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운영적 측면을 어떻게 합의하느냐가 큰 과제”라며 “(비핵화) 로드맵에는 확실히 도달해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북측에 영변 핵시설 폐기를 넘어 미국이 최종 목표로 제시한 비핵화의 큰 그림을 받아 들이도록 설득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외교 소식통은 “큰 틀에서는 미국 기조에 발맞춰 가면서도 비핵화 목표까지 가는 이행과정, 즉 로드맵에 있어서는 북측 의사를 반영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정부가 미국을 설득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절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북측을 협상장으로 이끌기 위한 명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가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일시에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나”라며 비핵화 일부를 ‘조기수확’할 필요성을 언급한 점은 미국에 이에 걸맞은 소폭의 경제적 보상조치를 요구할 것이란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미 조야에서는 미국이 비핵화 최종목표를 북측에게서 받아내려면 이에 상응하는 북한 경제발전 청사진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청와대가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조만간 고위급 대북특사의 방북을 추진할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 있다. 작년 5월 말 1차 북미 정상회담 무산 위기 당시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판문점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을 만나 북미회담 동력을 되살린 전례를 따라서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직접 미국을 방문해 입장을 확인한 서훈 원장이 대북특사로 나서는 그림이 자연스럽다”며 “특사를 통해 북측에 전략적 결단을 촉구하는 결연함을 보여주면서도 북미 중재자로서 우리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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