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민 비서실장 “문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 요청” 범국가기구 위원장 사실상 수락
문 대통령, 보수 아우르는 느슨한 협치… 안보이슈 등 물밑 카드로 부상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7일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 위원장직을 사실상 수락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반 전 총장을 위원장으로 한 기구 구성을 처음 제안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 수용한 데 이어 반 전 총장 본인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여권으로선 나쁘지 않은 정치 지형을 만들게 됐다. 느슨한 형태긴 하지만 합리적 보수까지 아우르는 ‘내각 외 협치’의 한 형태인 것이다. 특히 당장의 미세먼지 문제뿐 아니라 현정부의 한반도평화 드라이브와 관련해 물밑에서 반 전 총장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자유한국당의 고립이 심화되는 모양새도 불가피해졌다.
한정우 청와대 부대변인은 이날 서면브리핑을 통해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날 반 전 총장을 만나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 구성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노 실장은 이 자리에서 ‘미세먼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를 전하며 반 전 총장이 위원장직을 맡아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이에 반 전 총장은 “국제 환경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에 도움이 될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사실상 수용의사를 밝혔다.
반 전 총장은 범사회적 기구 구성과 관련한 구체적 구상도 전했다. 반 전 총장은 “미세먼지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매우 높으나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과제여서 본인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칠까 부담과 걱정이 있다”며 “미세먼지 문제는 정파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범국가 기구는 제정당, 산업계, 시민사회 등까지 폭넓게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대통령께서 전폭적으로 범국가적 기구를 지원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노 실장과 반 전 실장은 이어 범사회적 기구의 성격과 활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구체적 조직구성ㆍ운영ㆍ출범시기 등에 대해서는 실무협의를 통해 논의하기로 했다.
특히 반 전 총장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현정부의 외교안보 이슈에 도움을 받는 상황까지 감안한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 최대 현안인 남북경협과 관련해 유엔 제재 유예를 겨냥한 모종의 역할을 반 전 총장이 할 것이란 전망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8일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를 구성할 것과 반 전 총장에게 위원장을 맡길 것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아세안(ASEANㆍ동남아시아국가연합) 3개국 순방 중이던 12일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부터 현지에서 관련 보고를 들은 뒤 “적극수용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가장 민감한 민생과제인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여야가 팔을 걷고 ‘협치’에 나서는 그림이 완성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야당 대표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고, 지난 대선 보수 진영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됐던 반 전 총장과 손을 잡으면서 여권으로선 외연을 크게 넓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특히 선거제도 개혁 및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를 포함한 사법 개혁 등 일련의 개혁법안 처리를 위해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신속안건 처리)을 추진해 한국당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하는 모양새다.
일각에선 반 전 총장의 위원장직 수락이 정계복귀 수순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지난 15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이미 2017년 2월에 (정치의) 꿈을 접었다”고 말했다. 미세먼지 문제는 가뜩이나 국민적 민감도가 큰 정책과제이기도 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이날 공개한 ‘미세먼지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 2명 중 1명(55%)은 “미세먼지 감축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답했다. 연구원이 지난달 18∼28일 전국 성인남녀 1,008명에게 미세먼지로 인한 산업별 체감 제약 정도를 설문조사 한 결과다. 마스크를 사는 등 미세먼지에 대처하기 위해 가계가 지출한 비용은 가구당 월 평균 2만1,260원으로 조사됐다. 미세먼지로 인한 사회적 손실도 컸다. 지난해 미세먼지로 인한 경제적 비용은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2% 수준인 4조230억원으로 추정됐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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