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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9세기에 만든 자동 피리 연주 오토마타 ‘AI로봇의 원조’

입력
2019.03.16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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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중세 이슬람 세계 과학기술의 결정체, 오토마타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일보>에 매주 들려드립니다. 

알자자리의 저서에 수록된 물 따르는 오토마타 인형 삽화
알자자리의 저서에 수록된 물 따르는 오토마타 인형 삽화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인간의 몸짓, 표정, 어투를 빼 닮은 로봇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류는 언제부터 로봇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간단한 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인형이나 조형물인 ‘오토마타’가 오늘날 로봇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오토마타 제작은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시작됐다.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바누 무사 형제나 알자자리 같은 과학기술자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이나 자동 시보(時報) 장치가 부착된 물시계를 발명해 그 기술을 진일보시켰다. 이슬람 세계의 오토마타는 조선시대의 과학기술 발전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

 ◇중세 이슬람 세계, 헬레니즘 시대의 오토마타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다 

 

오토마타(Automata)는 최초의 힘이 가해진 후 미리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일련의 동작을 수행하는 자동기계장치를 가리킨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오늘날 로봇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오토마타 제작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고대 발명품 중 하나인 ‘지남차(指南車)’가 오토마타의 원조로 꼽힌다. 지남차는 방향이 바뀌어도 톱니바퀴 장치 때문에 수레에 부착된 인형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도록 만들어진 자동기계장치였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 나오는 지남차(왼쪽)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명된 자동물시계 '클렙시드라'(오른쪽)
중국의 고대 문헌에 나오는 지남차(왼쪽)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명된 자동물시계 '클렙시드라'(오른쪽)

서양에서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오토마타가 제작되었다. 기원전 250년경 크테비우스는 ‘클렙시드라’라는 자동물시계를 발명했는데, 시계에 부착된 인형이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시간을 가리키도록 만들어졌다. 한편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또 다른 발명가 필로는 약 65개에 달하는 기계장치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원후 1세기 무렵 헤론은 증기로 축의 바퀴를 돌리는 일종의 증기 기관인 기력구(汽力球)를 처음 발명했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축적된 자동기계장치 제작 기술은 기원후 9세기 무렵 이슬람 세계에서 계승돼 비약적인 도약기를 맞이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던 압바스조(750~1258)는 국가적 차원에서 학술과 문예를 체계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특히 압바스조의 7대 칼리파였던 알마문(813~833 재위)은 전문 번역‧학술연구기관인 ‘지혜의 전당’을 수도 바그다드에 설립한 후, 그곳에서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등으로 저술된 고대의 학술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한 후 이를 이슬람 세계의 과학과 기술 개발에 활용하도록 했다. 당시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서적 가운데는 필로와 헤론이 저술한 자동기계장치 제작에 관한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압바스조의 통치자들은 오토마타 제작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덕에 이슬람 세계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오토마타 제작 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0세기 초 압바스조 궁전 연못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가지와 유약으로 도금한 잎이 달린 나무 위에서 새 모습을 한 오토마타가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압바스조 통치자들은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연회를 베풀며 웅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오토마타를 공연처럼 보여주곤 했는데, 이는 군주의 위엄과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데 오토마타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바누 무사 형제, 이슬람 세계 오토마타 기술 발전의 초석을 놓다 

이슬람 세계에서 오토마타 제작 기술 발전의 초석을 놓은 주역은 9세기 무렵 바그다드에서 활약했던 바누 무사 형제(Banū Mūsā)였다. ‘바누 무사’란 아랍어로 ‘무사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무함마드 빈 무사’ ‘아흐마드 빈 무사’, ‘알하산 빈 무사’ 삼형제를 가리킨다. 삼형제의 부친이었던 ‘무사’라는 인물은 페르시아 출신이었는데 압바스조의 칼리파 알마문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친이 사망하자 알마문은 고아가 된 삼형제의 후견자가 되어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했다. 알마문은 삼형제가 모두 명석하고 학문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건립한 학술 기관인 ‘지혜의 전당’에서 근무하며 연구와 행정 업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바누 무사 형제가 발명한 자동으로 심지가 나오는 램프
바누 무사 형제가 발명한 자동으로 심지가 나오는 램프

850년경 바누 무사 형제는 칼리파의 의뢰를 받아 ‘기묘한 기계장치의 서’란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이슬람 세계에서 오토마타의 연구와 개발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저술서로 여겨진다. 이 저서에는 자동으로 물줄기 모양이 바뀌는 분수, 자동으로 물이 채워지는 그릇, 자동으로 심지가 나오는 램프, 자동으로 연주되는 오르간 등 약 100 가지에 달하는 기계장치가 삽화와 함께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 바누 무사 형제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대표적인 작품은 자동 피리 연주 오토마타다. 이 오토마타는 마치 오늘날의 로봇처럼 사람 모습을 한 인형이 프로그램화된 동작 순서에 따라 자동으로 피리를 연주하도록 설계됐다. 수차(水車)를 돌려 얻은 동력으로 핀이 꼽힌 원통을 돌려 피리의 구멍을 운지법에 따라 순서대로 개폐하고, 물통 속에 물이 채워질 때 빠져 나오는 바람의 힘으로 피리를 불도록 해 마치 인형이 스스로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알자자리의 코끼리 시계, 중세 이슬람 세계 과학기술의 백미 

 

이슬람 세계의 오토마타 제작 기술은 12세기 무렵 알자자리(al-Jazarī)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알자자리는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작은 토후국인 아르투크조(1101~1409) 궁중에서 활약한 과학기술자였다. 1206년 그는 군주의 요청에 따라 ‘기묘한 기계장치 제작에 관한 유용한 지식과 기술 집대성’이란 기념비적인 책의 저술을 완성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자신이 직접 제작해 본 경험이 있는 기계장치 50가지를 소개했다. 이 저서는 후대 사람들이 기계장치를 똑같이 제작할 수 있게 돕기 위한 교육 목적에서 저술되었고, 이 같은 이유로 기계 장치의 제작, 설치, 조립 방법이 삽화와 함께 매우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알자자리의 저서에 수록된 연회에서 연주하는 오토마타 악단 삽화
알자자리의 저서에 수록된 연회에서 연주하는 오토마타 악단 삽화

알자자리는 과거 바누 무사 형제가 고안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우면서도 복잡한 기계장치를 다수 발명했다. 알자자리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자동기계장치 가운데 하나는 물을 따르는 오토마타 인형이다. 이 오토마타는 일정한 시간마다 컵에 물이 가득 담기면 인형이 문을 열고 나와 물 컵을 손님에게 대접하도록 설계됐다. 알자자리의 자동 음악연주 기계장치는 바누 무사 형제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졌다. 알자자리는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인형이 동시에 피리, 하프, 탬버린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오토마타 악단을 만들었다. 알자자리가 이처럼 흥미롭고 복잡한 오토마타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플로트 밸브, 스로틀 밸브, 크랭크축, 캠축 같은 새로운 부품이 다양하게 개발됐고 관련 기술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알자자리의 저서에 수록된 코끼리 물시계 삽화(왼쪽)와 아랍에미리트의 샤르자 이슬람 문명 박물관에 전시된 알자자리의 코끼리 물시계 실물 모형(오른쪽)
알자자리의 저서에 수록된 코끼리 물시계 삽화(왼쪽)와 아랍에미리트의 샤르자 이슬람 문명 박물관에 전시된 알자자리의 코끼리 물시계 실물 모형(오른쪽)

알자자리의 발명품 가운데 많은 역사학자들이 최고의 백미로 꼽는 것은 코끼리 물시계다. 이 시계는 코끼리 인형 내부의 커다란 물통 속에 작은 용기가 잠기면서 끈을 아래로 잡아당길 때 발생하는 힘으로 구동된다. 그리고 물시계에 부착된 사람, 새, 용 모양의 오토마타는 일정 시간마다 미리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어 시간의 경과를 알리는 시보장치로서 역할을 한다. 알자자리의 코끼리 물시계는 12세기 이슬람 세계 과학기술의 정수가 집약되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시보장치 역할을 맡은 오토마타 인형이 세계 여러 문명을 상징하도록 디자인 되었다는 점에서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인도 문명을, 코끼리 등 위에 놓인 카펫은 페르시아 문명을, 꼭대기에서 노래를 부르는 불사조는 이집트 문명을, 회전축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며 공을 전달하는 용(龍)은 중국 문명을, 코끼리 등 위에 앉아 글을 적고 있는 서기는 이슬람 문명을 각각 상징한다. 코끼리 시계의 디자인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해외 문명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슬람 세계에서 진일보한 오토마타 제작 기술은 후대에 동서양의 과학기술 발전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알자자리의 코끼리 물시계는 조선 세종 때 장영실에 의해 제작된 자격루(自擊漏)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자격루는 12지신 나무인형이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을 알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오토마타 물시계인데, 중국 송나라의 물시계, 비잔티움 제국의 자동장치, 알자자리의 코끼리 물시계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종합하여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혁신의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과거 이슬람 세계의 과학기술은 우리나라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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