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36.5˚C] 남자는 카톡만 조심하면 된다?

입력
2019.03.14 15:17
수정
2019.03.18 15:00
30면
0 0

※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4일 오전 가수 정준영이 서울지방경찰청에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14일 오전 가수 정준영이 서울지방경찰청에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엄마, 설마 우리 방탄은 저러지 않겠지?”

‘정준영 카톡방’에서 오간 끔찍한 이야기를 본 중학생 딸이 물었다.

딸은 최근 며칠 사이 ‘세상 남자들’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갔다.

세상에 나쁜 어른들이 많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TV에 나오는 연예인이 여성에 대한 약물 성폭행이 일어나는 클럽을 운영한다든가, 성관계 영상을 찍고 공유하며 낄낄거렸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딸에게 이런 현실은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잔인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승리와 정준영만 문제가 아니다. 딸은 포털사이트의 기사 댓글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남자는 카톡만 조심하면 된다’는 글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해? 나 여태까지 이런 적 별로 없는데 너무 화나고 슬퍼.”

그뿐 아니었다. 12일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정준영 동영상’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내내 차지했다.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한 딸은 극히 일부가 아니라 상당수 남자들이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볼 뿐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 딸뿐 아니다. 역시 중학생이고 K팝 보이그룹 팬인 지인의 딸 역시 엄마에게 “남녀공학이 아닌 여대를 가고 싶다”고 했단다. ‘평범한 남자들’이 무서워진 것이다. 부모 품 안에서 다함 없는 사랑을 받고 자라다가, 이번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뼛속 깊이 느낀 여자아이들이 이 둘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111주년을 맞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 내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극도로 물화된 육체만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뉴스의 홍수가 여성을 좌절케 한다.

클럽 ‘버닝썬’은 ‘VIP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여성을 약물로 정신을 잃게 하고 성폭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한 정황이, 승리는 투자자들에게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같은 범죄 행위는 일선 경찰뿐 아니라 고위층까지 연결된 유착관계를 통해 묵인돼 왔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정준영 단톡방 멤버들은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하자마자 “동영상 없냐”는 말이 자동으로 올라 올 정도로 불법촬영 영상을 거리낌 없이 공유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버닝썬 사건이 나면 ‘버닝썬 룸 동영상’을 검색하고 정준영 사건이 나면 ‘정준영 동영상’을 검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지만 그들만의 단톡방에서는 본색을 드러낸다. “이런 건 좀 너무하지 않냐” “불법 아니냐” 식으로 불편해 하는 이들에겐 ‘진지충’이라며 남성만의 세계를 좀먹는 해충 취급한다. 바로 이들이 불법촬영물로 가득한 ‘소라넷’을 만들었고, 양진호의 거대한 웹하드 왕국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정준영 때문에 장자연이 덮이고 버닝썬 VIP와 경찰 유착 의혹이 덮인다”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의 본질은 여성을 도구화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정준영 사건이 터졌을 때 ‘정준영 동영상’을 검색하고 피해자 찾기에 나서는 사람, “범죄긴 하지만 나도 남자라서 이해한다”는 댓글을 쓰는 사람이 권력과 부를 얻는다면 바로 고 장자연 씨 같은 피해자를 만드는 가해자가 된다.

‘여성을 노리개 삼은 권력자인 그들’과 ‘나 같은 일반인’을 애써 구분 짓지 말았으면 한다. 대신 중학생조차 본능적으로 느끼는 여성으로서 생존의 공포에 공감하고, 혹시라도 내가 속한 단톡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적극적으로 반대에 나서겠다고 다짐하는 게 어떨까.

최진주 정책사회부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