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 영업환경 악화에
거액 출연금 앞세워 영토 확장
지방자치단체 금고은행 선정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형은행들이 거액의 출연금을 앞세워 출혈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지방은행들이 금고지기 역할을 하고 있던 지역 기초단체에 대형은행이 진출하며 원성을 사고 있다. 정부는 이달 중 ‘쩐(錢)의 전쟁’으로 변질된 금고은행 과당경쟁을 막기 위한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지만 은행 간, 중앙정부-지방정부 간 입장 차가 첨예해 당분간 진통이 이어질 전망이다.
◇지방으로 번진 ‘쩐의 전쟁’
12일 금융업계 등에 따르면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는 2~4년 주기로 금고은행 선정한다. 금고은행으로 선정된 금융기관은 지자체의 세입ㆍ세출, 자금관리 등을 담당한다. 일부 지자체는 일반회계(1금고), 특별회계(2금고)로 나눠 담당 은행을 따로 둔다. 올해도 50여 개 지자체가 금고은행 계약 기간 만료에 따라 새로운 금고은행을 선정할 예정이다.
그간 지자체 금고은행 경쟁엔 암묵적 규칙이 작동해왔다. 수도권은 대형 시중은행이, 지방은 농협은행이나 각 지역에 기반을 둔 지방은행이 맡아온 것이다.
하지만 영업환경이 악화한 시중은행들이 거액의 출연금을 무기로 ‘영역 싸움’에 나서면서 이 같은 흐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지난해 광주 광산구 1금고로 국민은행이 선정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광산구 1금고는 광산구가 광주시로 편입돼 자치구로 승격된 1988년 이후 농협이 30년간 맡아온 자리다. 국민은행은 지역사회기부금과 협력사업비 등 60억원 넘는 출연금을 약속하며 이보다 훨씬 적은 출연금을 제시한 농협을 압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광주 남구에서도 거액의 출연금을 제시해 광주은행을 밀어내고 금고지기가 됐다. 탈락한 농협과 광주은행이 심사의 공정성을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하면서 금고 경쟁은 법정다툼으로 비화했다.
서울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우리은행이 1915년부터 도맡아왔던 서울시 1금고가 올해 신한은행으로 바뀐 것이다. 연간 32조원에 이르는 예산을 주무르는 1금고를 따내기 위해 신한은행은 지난해 입찰심사에서 3,000억원대의 출연금을 제시해 1,000억원대를 써낸 우리은행을 제쳤다.
◇정부 이달 규정 개선한다지만
이처럼 출연금 경쟁이 심화한 것은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시ㆍ구 금고 관리 은행 선정 기준은 지자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통상 △총자본비율 △지자체에 대한 예금ㆍ대출금리 △주민 편의성 등 수납시스템 구축 △지역사회 기여 및 협력사업 등으로 구성된다. ‘지역사회 기여’에 속하는 은행 출연금 항목은 배점이 100점 만점에 최대 4점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항목의 점수가 워낙 대동소이해 낙찰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은행 출연금이 금고 선정을 조건으로 지자체에 지급되는 사실상의 리베이트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행정안전부와 금융위원회도 출연금 과열경쟁 문제점을 인식하고 지난해 합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 지자체가 금고은행을 선정할 때 적용하는 행안부 예규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지방은행의 요청을 받아들여 배점 과정에서 출연금 비중을 낮추고 지역 재투자 실적 등을 반영하는 내용이 골자가 될 전망이다. 이르면 이달 개선방안이 발표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행안부 관계자는 “(개선안이나 발표시기 등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사자간 입장 차가 크다. 시중은행은 TF의 지방은행 요구 수용 움직임에 대해 자율경쟁을 내세우며 반대하고 있다. 상당수 지자체는 출연금 항목 삭제에 반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군소 지자체의 경우 출연금 수입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지역경제 활성화 및 재투자라는 ‘당위적 명분’과 거액의 출연금이라는 ‘실리’ 사이에서 선뜻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려운 구도다.
6개 지방은행은 지난 11일 “금고지정 기준 개선 때 시중은행의 출연금 횡포를 막고 지방은행을 배려해 달라”는 내용의 공동호소문을 발표하며 여론전에 나섰다. 한 지방은행 관계자는 “배점을 2, 3점으로 줄여도 출연금 항목이 있는 한 거기에서 당락이 결정돼 현 상황과 달라질 게 없다”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위기 이후 메가뱅크 정책으로 시중은행과 지방은행 격차가 워낙 커지다 보니 곳곳에서 갈등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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