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일간지 가운데 한국일보는 동남아 지역에 가장 강력한 취재망을 갖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에 이어 이달부터 국내 일간지 최초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특파원을 파견했다. 고찬유 특파원이다. 고 특파원은 부임하자마자 ‘대어’를 낚았다. 임금 떼먹고 잠적한 한국인 사업가를 고발한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그 자체로 경쟁 매체를 압도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면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문 대통령은 ‘현지 당국과 수사를 공조하라’고 조국 민정수석에게 지시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에서 한국 기업이 현지 노동자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사건으로 해당 국가와의 신뢰 및 협력 관계가 훼손되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엄중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법무부는 범죄인 인도 조약 및 형사법 공조조약을 바탕으로 상호 협력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언급은 한국일보 기사의 정확성을 국정 최고책임자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일보 위상을 높였다는 점에서도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 피해를 준 한국인 사업가를 엄벌하고, 한국에 있다면 추방까지 하라’는 지시는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해당 구절은 이렇다. <섭공(葉公ㆍ초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몸가짐이 정직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숨겨줍니다. 정직함이란 바로 그러한 데 있는 것입니다.”>
섭공은 드러난 행동에 중점을 두고 정직을 따진 반면, 공자는 다른 차원의 정직을 추구하고 있다. 바른 것을 추구할 때도 근본이 되는 인간 도리, 겉보기 행동에 앞서는 대의(大義)부터 챙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펴낸 책이어서 논어는 섭공이 한방 먹은 것처럼 썼지만, 과거 관행이 하루 아침에 적폐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요즘 기준으로는 누가 옳은지 시비를 가리는 건 쉽지 않다.
대통령 지시에 대한 독자들의 온라인 뉴스 댓글도 엇갈렸다. 섭공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대통령님 정말 정직하다. 존경스럽다”, “도주한 한인 사업가를 끝까지 추적해서 엄벌에 처하라”는 칭송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았다.
도주한 사업가가 나와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데 주목한 댓글은 이랬다. “우리 국민을 남의 나라에서 벌해야 하겠습니까? 내 자식 잘못했다고 버리면 되나요? 자식을 보호해야 할 사람이 자식을 버리겠다고 공언하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을 텐데, 자국 국민을 먼저 범죄자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알아서 할 일을 왜 한국 대통령이 먼저 나섭니까?”, “한국에서 외국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범죄나 잘 대처해 주세요.”
앞서 밝혔듯 복잡한 가치판단이 얽힌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주목할 건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 대통령들은 섭공이 아니라 공자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지난 11일 말레이시아 검찰이 김정남 암살 혐의로 구금 중이던 인도네시아 여성을 풀어준 건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의 강력한 로비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철강 관세를 두 배나 올리는 경제보복 조치까지 감행한 끝에 터키 정부가 간첩 혐의로 2년째 억류했던 앤드루 브런슨 목사를 지난해 10월 석방시켰다. 두 대통령 모두 ‘무조건 풀어주라’는 막무가내 행태를 보인 셈이다.
두 대통령과 우리 대통령 중에서 누가 더 멋있고 국민의 편에서 일했는지는 총체적 치적을 바탕으로 결국 역사가 판단하게 될 것이다.
조철환ㆍ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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