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할 때 혈액ㆍ수액 온도조절용
美 바이에어사 가온기 ‘엔플로’
신경계 이상ㆍ알츠하이머 유발
고농도 알루미늄 인체유입 드러나
‘위험 수준’의 고농도 알루미늄 배출 사실이 드러나 영국 의료계를 뒤흔들고 있는 미국산 의료용 가온기가 한국에도 도입된 것으로 확인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긴급 대응에 나섰다. 가온기는 외과 수술을 받거나 회복 중인 환자에게 주입할 혈액이나 수액을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조절하는 기구인데, 이 과정에서 다량의 알루미늄이 체내에 유입될 경우 신경계 이상이나 알츠하이머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식약처는 영국 언론보도로 논란에 휩싸인 가온기가 2011년부터 한국에도 300대 정도 수입돼 일부 병원에서 사용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12일 밝혔다. 식약처 관계자는 “사용을 가급적 자제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안전성 서한을 의약 전문가 등에 11일 배포했다”고 말했다.
문제의 가온기는 미국 업체인 바이에어메디컬(Vyaire Medicalㆍ이하 ‘바이에어’)이 만든 ‘엔플로(enFlow)’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디언이 지난 3일(현지시간) 이 제품의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논란이 본격화됐다. 가디언에 따르면 “엔플로를 통과한 용액에서 안전 기준치를 수백배 초과하는 알루미늄이 검출됐다”는 소식을 접한 영국 왕립맨체스터아동병원과 샐포드왕립병원 등이 이미 지난달 말 ‘엔플로 사용 중단’ 결정을 내렸다. 영유아와 어린이가 고농도 알루미늄에 노출되면 치명적인 신경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가디언은 엔플로의 위험성이 올해 1월 독일 괴팅겐대학병원 연구진의 실험에서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 기기를 통해 가열된 전해질 용액에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정한 안전 기준치(리터당 25㎍)보다 무려 280배나 많은 리터당 7,000㎍의 알루미늄이 검출된 것이다. 엔플로는 알루미늄 재질 가열판으로 수액 또는 혈액을 직접 가열하는데, 높은 온도의 가열판이 전해질 용액과 반응하면서 알루미늄이 용출됐을 것이라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통보받은 영국 의약품건강관리제품규제청(MHRA)은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고, 지난 8일 엔플로의 위험성을 공식화하는 의료기기경보(MDA)를 발령했다. MHRA는 성명에서 모든 의료인들을 상대로 “가능한 한 (엔플로가 아닌) 대체 의료기기를 사용하라”면서 “대안이 없다면, 엔플로의 사용 전에 임상 위험-효과 분석을 면밀히 수행하고, 이를 문서화하라”고 요구했다. 사실상의 ‘퇴출 명령’을 내린 셈이다. 바이에어는 당초 엔플로에 대해 “시판 전 엄격한 안전성 검토를 했고, 그동안 어떤 유해 사례나 사고도 보고되지 않았다”고 했으나, MHRA 발표가 있자 “(당분간) 마케팅 활동을 중단하고, 추가적인 안전성 확인 테스트를 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영국 입장에서 이 사안이 심각한 까닭은 엔플로가 꽤 널리 보급돼 있어서다. 가디언은 “영국 내 병원 곳곳에서 매일 수천 건의 의료 절차에 엔플로가 쓰인다”며 “이 장비는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 10년 이상 사용돼 왔다”고 전했다. 맨체스터 위센쇼병원의 마취과 의사인 마이클 찰스워스는 “그 정도로 많은 알루미늄이 환자에게 방출될 수 있었다니, 의사로서 깜짝 놀랐다”며 “장기간의 임상적 문제를 유발할지, 아닐지 지금은 알 수조차 없다”고 우려했다.
우리 보건당국도 초기 대응에 나섰다. 식약처 관계자는 “영국 당국의 권고와 거의 동일하게 가급적 엔플로 사용을 자제하고 다른 제품으로 대체하라는 안전성 서한을 배포했다”며 “이 제품을 사용하던 병원을 전수조사한 결과 모두 대체품이 있어 이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이모(36)씨는 “우리 병원에선 엔플로를 쓰지 않지만, 다량의 알루미늄이 환자 몸 속에 쌓이면 신경계 이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의료계 일각에서는 영국처럼 심각한 상황이 우려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의 경우, 현재 영국처럼 엔플로를 다량으로 사용하는 병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사용 빈도 등에 대한 구체적 실태는 파악되지 않은 상태여서 당국의 후속 조치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바이에어 한국지사 관계자는 엔플로의 국내 수입 사실만 인정했을 뿐, 판매량 등에 대해선 “미국 본사에 물어보라”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홍윤지 인턴기자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