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 이젠 읽지 말고 보세요
요즘 사보는 예전 사보가 아니다. 회장님이나 사장님의 사진이 실리고, 그 밑에 빽빽하게 적혀 나오는 각종 훈시들. 회사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외국인들 사이에서 설계 도면 등을 펼쳐 보인 인물 사진 위로 ‘○○인들, 세계 ○○에 가다’와 같은 자화자찬에 가까운 회사 얘기들. ‘연말연시에 떠나보는 조용한 ○○’이라는 제목 아래 정적이 가득한 풍경 사진이 가득했던 여행 얘기 등. 지금 이 시간, 사보라는 말을 듣고 이런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당신은 요즘 사보를 접해보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7일 오후 서울 장교동 한화그룹 빌딩. 유쾌해 보이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직장인 3명을 만났다. 그들은 예전 방식으로 표현하면 사보를 만드는, 회사 동료들에게는 재미를 선사하고 외부 사람들에게는 회사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영상을 만드는 ‘작가 겸 PD’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소속된 곳 이름도 근사하다. ‘한화커뮤니케이션위원회’
◇그들이 아닌 우리 얘기를 만들다
이들이 하는 일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위원회에 있는 15명 안팎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 회사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일의 시작이다. 수시로 아이디어를 모으고, 어떤 식으로 만들어볼까 머리 속으로 상상해본다. ‘취재원’으로 회사 내 누군가를 찍었다면 ‘한 번 만나자’고 설득도 해야 한다. 다행히 만난 후 나온 결과물이 있다면 편집 등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야 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예전 사보처럼 누군가 써 놓은 글을 읽으려고 하면 ‘참 일방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영상을 통해서 보면 또 다르지 않을까요? 화면 속에 내가 아는 사람이 등장하고 또 자주 듣던 목소리로 자신이 겪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이야기’가 되는 거니까요.” 셋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경험이 많은 우병조(34) 대리의 얘기다.
우 대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소통이다. 그것도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하는 일방적인 얘기가 아니라, 양쪽에서 서로 주고 받는 양방의 대화. 작년 말 임직원 대상으로 노래 경연 영상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이전 사보 때와는 격이 다른 소통의 장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누가 참여를 할까 걱정 했는데, 300건 가까이 영상이 들어왔어요. 자신들이 직접 찍어서 올린 것들이었죠.” 몇 번의 편집을 거쳐 프로그램은 사내 채널을 통해 방송 됐고, 반응은 뜨거웠다.
◇재미로 동료들 눈을 사로잡다
옆에 있던 주완(29)씨도 거들었다. “‘H로그’라는 코너가 있어요. 임직원 중 한 명이 스스로 주인공이 돼 하루의 일과를 영상으로 찍는 거죠. 하루 24시간을 보여주면서 실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게 힘들고 재미있는지, 가감 없이 솔직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특히 취업준비생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고 들었어요.” 그는 ‘예전 사보 시절에는 이런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실제 주씨가 소개한 영상이 대개 그랬다. 직장 상사와 신입사원이 함께 출연해 요즘 유행하는 ‘급식체’를 얼마나 아는지 알아보는 영상 같은 것들 말이다.
조혜림(29)씨는 이번 주부터 공개될 영상 마무리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웹드라마로 한 번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10분 안팎 분량으로 6부작 정도를 낼 계획인데 거의 준비는 끝났어요.” 배우 섭외나 기본적인 대본 작성, 촬영 등은 물론 전문 업체와 협업하는 구조이지만, ‘보다 재미 있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약간은 자랑 섞인 설명. “재미있는 직장 문화 얘기가 나오는 오피스 드라마니까, 회사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될 것 같아요.”
그런 그에게 최우선은 역시나 ‘재미’다. “사보라고 해서 윗사람, 경영진이 하고 싶은 말만 죽 해 놓으면 누가 읽겠어요. 영상에 함께 참여하고, 그걸 보면서 회사에 대해 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주변에 읽을거리 볼거리가 충분히 많잖아요. 보다 재미있는 소재, 이런 걸로 눈을 사로잡는 게 중요한 거죠.”
◇사보, 이제는 읽지 말고 보자
사실 사보는 몇 년 전부터 바뀌고 있었다. 2016년 9월 ‘김영란법’ 시행으로 사보 제작을 담당하는 직원과 발행인이 언론인 범주에 속한다는 해석과 함께 회사 고객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던 종이 사보가 점차 자취를 감췄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외환 위기와 이후 몇 차례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비용 절감에 나선 기업들이 사보를 없애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단 ‘트렌드의 변화’에 방점을 찍는 이들이 많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사내 소통 방식의 변화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뀌고, 일방적으로 위에서 지시하면 밑에서 보고하는 것 대신 자발적으로 사내 문화를 함께 공유하려는 분위기가 사보 변화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종이 사보는 인터넷 웹진으로 대체됐고, 웹진에서 다시 유튜브 등 영상물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실제 필요에 따라 아직도 종이 사보를 고집하거나 오히려 없던 사보를 새로 만들어 내는 회사도 있다. ‘회사의 필요에 따라, 혹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사보는 나름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백 대표는 “내용과 형식이야 많이 달라졌겠지만 좀 더 즐길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정보를 공유해 소속감을 키운다는 그 역할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김청환 기자 ch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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