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고 사적인 기억 하나를 꺼내 본다. 엄마와 처음으로 단 둘이 해외 여행을 갔을 때였다. 새파랗다 못해 투명한 동남아의 바다 위에 보석 같은 물비늘이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 정말 예쁘다”고 말하기 위해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평화의 순간에 엄마는 서러운 얼굴로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너희 할머니는 평생 이런 멋진 풍경 한 번을 못 봤잖아.”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누구라도 하나쯤은 갖고 있을 엄마와, 엄마의 엄마에 대한 기억을 꺼내보고 싶게 만드는 경장편이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혹은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상대인 ‘엄마’를 ‘친애’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문지문학상’ ‘이해조 소설문학상’을 수상한 백수린 소설가의 신작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 때문에 대학을 휴학한 스물두 살의 ‘나’는 혼자 지내는 할머니를 몇 달간 돌봐 드리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어차피 넌 할 일도 없잖아”라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이는 엄마. 매사에 열심히 하는 법이 없고 그나마도 포기하는 일이 허다한 ‘나’와 달리 젖먹이를 떼놓고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와 교수가 됐을 만큼 철두철미한 그런 엄마다. 할머니는 엄마를 대신해 나를 돌보고 결핍을 채워준 사람이었다. 나는 서울 북서쪽 항구 도시의 낡은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그곳에 머물러 있는 할머니와 엄마의 기억을 만나게 된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백수린 지음
현대문학 발행ㆍ152쪽ㆍ1만1,200원
엄마와 할머니는 처음부터 엄마와 할머니가 아니었다. 소설은 “완벽한 여름의 어떤 날 달궈진 모래를 맨발로 밟고 걷다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옷을 벗고 바닷물로 뛰어드는 알몸의 여자”이기도 했던, 엄마와 할머니의 옛 모습을 비추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어떤 엄마는 더 이상 엄마가 아니게 된다. 할머니의 친구인 글로리아 할머니는 오랜 식당 일로 관절이 망가져 열 손가락 모두 끝까지 구부리지 못하는 노인이다. 그에게도 엄마인 시절이 있었다. 1960년 4ㆍ19혁명 때 시장통 국밥집에서 일하며 혼자 아이 셋을 키워 낸 서른한 살의 씩씩한 엄마. 엄마이거나 엄마였던 여성들의 삶은, 지금 엄마이거나 언젠가 엄마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하다.
할머니는 암 투병 끝에 죽고, 나는 예상치 못하게 생긴 아이 때문에 스물두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또 다시 ‘엄마’가 된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나에 앞서 엄마였던 여성들의 삶을 떠올린다. 엄마이기 때문에 그들이 포기해야 했던 것들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의 존재를 다시 보는 나. ‘사랑’보다는 ‘친애’의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이해하고, 이내 화해한다.
작가가 책의 말미에 밝힌 “이 짧은 소설이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삶과 죽음, 상처와 용서, 궁극적으로는 다정하고 연약한 인간들을 끝내 살게 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충분히 성취된 소설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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