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톰슨(1933~2019)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미국 연방의회는 1972년 6월 교육법을 개정(Title Ⅸ), 초ㆍ중등 공립학교 커리큘럼과 특별활동의 성차별을 금지했다. 지역과 여건에 따라 다르긴 했겠지만, 그 전까지 학교 운동장과 체육관은 주로 남학생 차지였고, 운동부도 대부분 남자들만 받았다. 여학생 커리큘럼에는 체육 수업이 아예 없는 곳도 많았다. 한 마디로 스포츠는 남성의 영역이어서, 1967년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한 독일계 여성 캐서린 스위츠(Katherine Switzer, 1947~)보다 그를 밀치고 잡아당긴 남성 참가자들이 더 ‘상식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니 뉴욕 브루클린의 변호사 프레드 톰슨이 1959년 흑인 여성 육상클럽 ‘아톰 트랙 클럽 Atom Track Club’을 만든 건, 조금 과장하자면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 팀을 만드는 것에 견줄 만한 일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시민회관 복도가 그들의 트랙이었고, 몰래 학교 담장을 넘나들기도 했다. 멤버는 8세부터 30대 주부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10대였다. 가입-강습은 당연히 무료. 하지만 청소년의 경우 엄격한 회원 요건이 있었다. 성실히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 당시 뉴욕, 특히 브루클린의 가난한 10대 흑인 청소년들에겐 학교보다, 달리기보다, 훨씬 유혹적인 것들-술 마약 섹스 폭력-이 널려 있었다.
그런 어려움들을 딛고 톰슨의 아톰클럽은 60, 70년대 다수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전미육상대회 스타 선수들을 배출하며 독보적인 흑인 여성 육상 명문 클럽으로 이름을 날렸다. 설립자이자 유일한 코치 겸 후원자인 톰슨은 스포츠 아마추어리즘의 시대가 전설이 된 2000년대까지, 다시 말해 트랙에 서 있을 힘이 다 빠지기 전까지 클럽을 지켰다. 개정 교육법 ‘타이틀 나인’의 영향으로 여학생 운동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73년, 그는 생활용품회사인 ‘콜게이트’사의 요청으로 미국 최대 여성 아마추어 육상대회인 ‘콜게이트 위민스 게임’을 창설했다. 그는 그 해 변호사업을 아예 접고 대회 운영위원장으로 2014년까지 일했다.
아톰의 아이들은 톰슨을 코치란 호칭 대신 ‘프레디 Freddie’라 불렀고, 성인이 된 뒤에도 힘들 때면 찾아와 기대곤 했다. 그들에게 톰슨은 ‘스톱워치’로는 잴 수 없는 귀한 것들을 베푼 멘토이자 친구였다. 프레더릭 D. 톰슨(Frederick Delano Thompson)이 1월 22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뉴욕 맨해튼 할렘의 흑인들이 이스트강 너머 브루클린으로 밀려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대공황 실직 사태로 일자리를 잃고 유럽 이민자 유입으로 집세가 부담스러워진 이들이었다. 변두리긴 해도 브루클린에는 일거리 많은 상업 항구와 해군 군항이 있었다. 마침 36년 지하철 풀턴라인(IND Fulton Line)이 개통했다. 프레드 톰슨이 그 무렵인 1933년 5월 21일 브루클린 베드퍼드스타이베슨트(Bedford-Stuyvesant)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부모가 이혼하면서 다섯 살이던 그와 동생은 이모(Ira Johnson)에게 맡겨졌다.
브루클린의 활력도 50년대부터 식기 시작했다. 슬럼이 확산되고 부동산 부담이 커지면서 공장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당연히 부두도 한산해졌다. 연방ㆍ주 정부의 주택자금 지원정책으로 중산층 백인들이 대거 퀸즈나 롱아일랜드, 뉴저지 등지로 이주했고, 그 빈 자리를 흑인과 이민자들이 채워갔다. 휴버트 셀비2세(1928~2004)가 소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Last Exit to Brooklyn’에 담은 마약과 폭력의 브루클린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무렵의 사정이지만, 그게 결코 바닥이 아니었다. 55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누른, 흑인들의 자부심 재키 로빈슨(1919~1972, 흑인 첫 메이저리거)의 브루클린 다저스가 57년 연고지를 LA로 옮겼다. 10년 뒤인 66년 해군기지가 폐쇄됐고, 브루클린 최악의 해로 기록된 폭동ㆍ약탈의 대정전 사태(77년)가 이어졌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브루클린 르네상스의 물꼬를 튼 것은 1990년대 이후였다.(thirteen.org)
어린 톰슨 형제에게 이모는 늘 두 가지를 당부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장은 아무도 못 빼앗아가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따라는 것, 혼자 잘 살지 말고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것이었다.(nyt, 1979.2) 사실 저 두 지침은 블랙파워운동의 정신이자 60년대 시작된 아프리칸아메리칸의 문화축제 ‘콴자(kwanza)’의 정신이었다.
톰슨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모교이기도 한 브루클린 명문 보이즈고교(Boys High Schol)를 거쳐 뉴욕시티칼리지에서 화학공학과 역사학을 전공했고, 58년 세인트존스대 로스쿨을 나와 61년 브루클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50년대 말 브루클린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일상 사진전을 연 한 포토저널리스트에 따르면 당시 뉴욕에는 10대 갱만 약 1,000여 명이 활동했다. 톰슨은 “갱들이 지천이어서 아이들은 쉽사리 거기 휩쓸리곤 했다. 지금 같진 않았지만 마약도 문제였다”고 말했다. 가정 환경도 대부분 좋지 않았고, 저마다 이성문제 등 개인적인 문제를 지닌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nyt, 1985.3) 그는 그런 사정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굳이 육상을 선택한 건, 가장 돈 안 들이고 당장 할 수 있는 종목이기 때문이었다. 고교-대학 시절 그는 육상부원이었다. 그는 “나는 스타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포츠가 가르쳐준 것들, 이를테면 규율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로스쿨을 졸업하자마자 시험 삼아 육상 모임을 시작했고, 2년 군복무를 마친 뒤 변호사로 돈을 벌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말한 스포츠의 ‘규율’은 비행ㆍ범죄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었다. 베드퍼드스타이베슨트의 주민회관인 커뮤니티센터 복도가 아톰클럽의 첫 훈련장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땐 방과후 인근 학교 담장을 넘기도 했다. 브루클린의 기술ㆍ예술 전문학교인 ‘프랫 인스티튜트 Pratt Institute‘가 체육관 한 켠에 비품 창고 겸 연습장을 내어준 뒤부터는 허들 훈련도 할 수 있게 됐다. 예술 명문인 프랫 인스티튜트는 “계층ㆍ인종ㆍ젠더 차별 없이 동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자”는 취지로 한 사업가가 1887년 설립한 학교다. 그렇게 비바람은 피할 수 있게 됐지만, 거기서도 대학 선수들이 훈련을 시작하면 멈춰야 했다.
그런 설움과 어려움에도, 마분지 잘라 잉크로 직접 찍은 ‘ATOM CLUB’ 티셔츠 유니폼을 아이들은 자랑스러워했다. 클럽 구성원은 그들의 새로운 가족이었고, 점점 나아지는 기록은 열정을 쏟아 도전할 만한 일이었다. 아톰 멤버는 평균 50여 명, 많을 땐 근 200명에 이르기도 했다. 딸의 연습 장면을 구경- 응원하려고 가족들이 찾아오는 예도 점차 늘어났다. 간식거리를 챙겨오는 이들, 어두울 때 쓰라고 플래시를 만들어 선물한 부모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대회에 학교 대표팀이 아닌 ‘아톰 클럽’ 소속으로 출전하는 것도 대회 규정상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육상 트랙이 아닌 실내 구기코트에서, 코너링 연습도 못하는 직선 주로(走路)만 주로 달린 아이들이었지만, 20주년이던 79년 무렵 그들은 이미 5차례 전미 실내 육상대회 팀 우승과 옥외 대회 3번 우승, 10여 개의 개인 금메달을 획득한 명문팀이 돼 있었다. 텍사스대와 애리조나대 등이 톰슨에게 꽤 탐나는 연봉을 제시하며 육상팀 코치를 맡아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제 돈을 써야 하는 아톰 클럽 코치로 남았다. 그 해 그를 인터뷰한 NYT 기자는 톰슨이 어린 멤버들을 가리키며 ‘난 그들의 (코치가 아니라) 친구’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는 멤버들의 학교 출석부와 성적표를 늘 챙겼다. “잘 달리는 못지않게 공부가 중요하다”고, 이모가 어린 그에게 늘 말했듯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팀 성적 못지않게 창단 이후 15년 사이 팀원 중 약 50명이 대학에 진학해 교사나 변호사, 간호사, 학자, 사업가가 된 걸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72년 뮌헨 올림픽 은메달리스트(400m 계주) 셰릴 투생(Cheryl Toussaint. 1952~)이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3살이던 65년 여름 아톰 클럽에 들어 70년 전미육상대회 600야드 신기록을 세운 투생은 올림픽 후 뉴욕대(수학 전공)를 나와 증권회사 메릴린치에서 일했다. 79년 NBC TV 다큐 ‘Real People’이 방영한 톰슨 특집에서 투생은 “아톰 클럽은 내게 용기를 준 제2의 가족이다. 만일 누가 프레드를 성자(saint)라 부른다 해도, 나는 흔쾌히 동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72, 76년 올림픽에 조국 바베이도스 대표로 출전했던 로나 포드(Lorna Forde, 1952~)는 “프레디는 미친 사람이다. 자기가 번 돈 거의 전부를 우리에서 쓰면서 ‘돈이야 나중에 벌면 되고…’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톰슨은 평생 독신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두어 차례 결혼할 기회가 있었지만 잘 안 됐다고, “어떤 여자가 나처럼 사는 걸 곱게 봐주겠냐”고 말했다.
72년 교육법이 바뀌면서 여학생 운동부를 만드는 게 학교 운영 예산을 타내는 데 유리해졌다. 운동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생활용품 회사인 콜게이트 파몰리브(Colgate-Palmolive)사가 톰슨에게 경비를 댈 테니 아마추어 여자 육상경기대회를 만들어달라고 청한 게 그 해였다. 이듬해 봄 ‘제1회 콜게이트 위민스 게임’에는 초등 1학년부터 대학생 및 30대까지 미국 동부지역 여성 5,000여 명이 육상 단거리와 높이뛰기, 투포환 등 8개 종목에 출전했다. 예선 출전 자격은 단 하나, 초ㆍ중등생의 경우 출석부 사본을 제출하는 거였다. 예선과 준결승을 거쳐 결승에 오른 학생들은 대회 직전 공지하는 주제의 에세이도 제출해야 했다. 주최측이 밝힌 대회 목적은 “젊은 여성들의 개인적 성취감과 자존감, 교육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거였다.(colgategames.com)
84년 LA올림픽과 88년 서울올림픽 400미터 계주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다이앤 딕슨(Diane Dixon, 1965~)도 12살 무렵부터 ‘아톰 클럽’서 달리기를 배운 톰슨의 제자였다. 딕슨은 “톰슨은 나를 키우다시피 했고, 나를 달릴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다. 내가 세상에 나설 수 있게 해준 게 그였다”고 말했다. 그런 딕슨이 올림픽 한 해 전인 87년 톰슨과 다툰 뒤 결별을 선언, 오하이오의 센트럴주립대 등서 다른 코치들과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둘은 88년 서울올림픽 미국 여자 육상 대표팀 단거리 코치와 선수로 함께 했다.
결혼-이혼 등 방황과 슬럼프를 겪던 끝에 딕슨은 90년 무렵 톰슨의 아톰 클럽으로 되돌아왔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인터뷰에서 톰슨은 “다이앤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의 곁에 안 좋은 이들이 좀 있었다”고 말했다. 마약을 팔다 10년 형을 받은 다이앤의 전 남자친구가 그런 이들이었다. 딕슨은 톰슨 바로 옆집에 살며 프랫 인스티튜트의 아톰 훈련장에서 다시 연습을 시작했고, 91년 전미 챔피언스 400m 결승서 50초 64의 미국 신기록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대회 직후 인터뷰에서 딕슨은 “달리는 동안 내겐 프레디의 목소리만 들렸다. 경기장의 모든 소음 속에서도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기록은 2010년까지 건재했다.(si.com)
아누차 샌더스(Anucha Browne Sanders, 1963~)는 아톰 클럽을 거쳐 노스웨스턴대 농구팀서 활약하며 2차례 ‘올해의 선수(‘Big Ten Player of the Year)’에 뽑힌 이력의 스타였다. 그는 여자프로농구(WNBA) 출범 전인 85년 대학을 졸업(커뮤니케이션 전공),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마케팅-커뮤니케이션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IBM의 스포츠 마케팅 프로그램 매니저와 올림픽 국가대표팀 홍보파트에서 일했다. 그는 프로스포츠 컴플렉스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사의 NBA팀 뉴욕 닉스(Knicks)의 마케팅 이사(2000)와 팀 수석부회장(2002)을 지내다 2006년 갑자기 해고 당했다. 직후 샌더스는 자신의 상관인 총괄매니저(Isiah Thomas)의 성희롱 사실을 폭로하며 그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상관의 성적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성 해고라고 그는 주장했고, 회사측은 샌더스의 미흡한 업무 성과가 해고 사유이며 성희롱은 없었다고 맞섰다.
샌더스의 곁에 73세의 전직 변호사이자 전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프레드 톰슨이 있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소 제기 후 샌더스와 그의 가족이 겪은 직ㆍ간접적 협박과 위협들을 폭로하며 가해자 측의 비열한 행위를 고발했다. 그리고 “아톰 클럽의 모든 어린 선수들에게 샌더스는 모범적인 롤 모델 중 한 명이다. 그의 꿈이 지금 무참히 부서졌다. 농구는 그의 사랑이고 삶이었다. 지금 나는 무척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법원은 토마스의 성희롱 사실과 사측의 은폐 혐의를 인정, 회사가 징벌적 손해배상금 1,100만 6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양측은 그 해 12월 1,100만 50만 달러에 합의했다.
톰슨은 알츠하이머 병을 앓았다. 셰릴 투생은 1999년부터 콜게이트 대회 부위원장을 맡아 노쇠한 스승을 도왔고, 로나 포드는 이웃에 살며 그를 아버지처럼 간병했다. 지난 2월 2일 제45회 콜게이트 대회 결승은 상복 차림의 투생이 위원장을 맡아 치렀다. 그리고 닷새 뒤 브루클린의 한 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제자들은 단체 추도사에서 “우리는 톰슨처럼 놀랍고 비범한 이를 만나 함께 지내는 커다란 행운을 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미소 지을 수 있는 것도 모두 그의 덕입니다”라고 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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