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배우 윤지오 ‘13번째 증언’에서 주장
숱한 의문을 남겼던 고 장자연씨 사건 관련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가운데 장씨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큰 영향을 끼쳤던 소속사와의 계약 내용 일부가 공개됐다. 당시 같은 소속사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 배우 윤지오씨의 최근 출간 자서전 ‘13번째 증언’을 통해서다.
300만원 상당에 불과한 계약금을 받았지만 이른바 ‘갑’의 지위에 있는 소속사 대표의 지시에 불응할 경우 위약금 1억원에 막대한 손해배상까지 해야 하는 등 사실상의 ‘노예 계약’이었다는 게 윤씨 주장이다. 장씨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직전까지 소속사와의 계약 해지 방안을 모색했으니 끝내 실패했다. 장씨는 생애 처음 참석했던 시상식 당일, 강제 추행을 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당시 입었던 하얀 드레스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7일 윤지오씨의 저서 ‘13번째 증언’에 따르면 윤씨는 2007년 12월쯤 계약금 300만원을 받고 D엔터테인먼트 대표 김모씨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윤씨는 당시 자신이 맺었던 계약은 역시 신인이었던 장씨가 앞서 맺은 계약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했다.
◇배우 장자연과 윤지오의 ‘노예 계약’
책에서 공개한 계약서의 내용은 크게 △‘을’의 의무 △계약해지 및 손해배상 △갑의 권한 등 크게 세 부분이다. 윤씨나 장씨가 따라야 했던 의무 규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을은 연예활동 전반에 걸쳐 갑의 결정 및 지시에 충실히 따라야 하며 을은 계약 기간 중 갑이 인정하는 사유로 연예활동을 일시 중단할 경우 그 기간만큼 (계약이) 자동 연장된다’는 부분이다. 갑인 대표 김씨의 결정 및 지시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없어, 사실상 어떤 지시든 김 대표의 요구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장씨나 윤씨가 수 차례 외부 인사 접대 자리에 동원됐음에도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도 이 같은 계약 상의 독소 조항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배우인 윤씨나 장씨의 초상권 등의 활용과 활동은 반드시 김 대표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했다. 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행위를 하거나 활동 스케줄에 2회 이상 불성실하게 임할 때, 연예활동에 지장을 주는 행동을 한 때 계약 위반을 한 것으로 간주돼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연예활동에 지장을 주는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찾아볼 수 없는 독소조항이었다.
장씨나 윤씨에게 가장 정신적, 물질적 압박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단연 계약 해지 및 손해배상에 관한 조항이다. 먼저 중도에 계약 해지를 하려면 윤씨와 김 대표 쌍방의 합의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도록 하면서도 을이 앞서 기재한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갑이 일방적으로 해지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갑은 독자적인 재량에 따라 연예인으로서의 을의 능력, 소양, 재능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경우 계약을 해지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사실상 윤씨나 장씨는 계약을 해지하려면 김 대표의 승인이 필요하지만 김 대표가 원할 때는 언제든 해약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위약금 1억원과 손해배상
나아가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경우에 내몰리게 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의무사항 위반으로 간주될 경우 위약 벌금을 무려 1억원을 물도록 돼 있었다. 장씨가 가장 우려했던 것도 이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갑이 을을 관리하기 위해 발생한 비용 중 증빙자료가 있는 모든 경비를 을이 갚아야 한다’는 대목도 문제였다. 연예활동에 소요된 의상이나 메이크업 비용, 매니저 급여 제공 등 활동 경비도 영수증 같은 자료만 있으면 김 대표가 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계약 해지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반환해야 했다. 추가로 ‘중도 계약 해지 시 잔여 기간 동안에는 을의 모든 수익활동의 20%를 갑에게 지불해야 한다’는 항목도 존재했다. 계약을 해지해도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불공정 계약 하에서도 연예계 활동을 꿈꿨던 윤씨는 본격적인 데뷔나 출연보다는 김 대표가 부르는 술자리에 셀 수 없이 불려나가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계약 해지를 마음먹었다고 했다. 특히 2008년 8월 5일 김 대표의 생일 파티 2차 자리에서 장씨가 전직 기자 조모 씨로부터 강제 추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큰 상처로 남았다고 한다.
윤씨는 자신은 다행스럽게도 김 대표에게 600만원만을 물어주고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받은 것은 계약금 300만원과 매월 30만원씩, 10개월간의 활동비 300만원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10개월간 변변한 연예활동 지원도 받지 못하고 온갖 접대 자리에 불려나가야 했지만 그 정도로 마무리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노예계약 벗어나지 못한 장자연
그러나 장씨의 상황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D사를 나온 후 윤씨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 촬영장 등에서 만난 장씨가 자신에게 어떻게 계약 해지를 할 수 있었는지를 수 차례 물었다고 했다. 장씨 역시 D사를 나오고 싶었지만 김 대표가 반대하고 있었고 위약금 1억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막막해 했다는 것이다. 윤씨는 특히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인 2009년 즈음에는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던 장씨가 스타일리스트와 매니저의 월급, 기타 활동 경비를 모두 자비로 충당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당시 김 대표는 일본으로 잠적,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만 빠져 나온 것을 두고 수 차례 자책했다는 윤씨의 책에는 2009년 8월 27일 장씨가 드라마 출연진 자격으로 참석했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장면 회상도 나온다. 그날 장씨가 생애 마지막이 돼버린 레드카펫 입장 때 입었던 의상은 화이트 드레스였다. 윤씨는 그 드레스가 2008년 8월 강제추행을 당했을 때 장씨가 입었던 옷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살아 생전 장씨는 윤씨에게 “돈이 필요하다”, “애기야 너는 발톱의 때만큼도 모른다”는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장씨가 자신이 접대한 고위 인사들의 명단을 기록했다는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표기된 작성 시점은 시상식 다음날인 2009년 2월 28일 이었다. 그리고 장씨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2009년 3월 7일 스스로 생을 저버렸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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