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생 아들과 점심을 같이하는데 아들이 대뜸 물었다. “아빠, 아빠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지지율이 낮은 것이 우리가 박근혜 정부 때 교육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아들은 최근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의 지지율이 낮아진 것이 자신들이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시절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여당 의원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들의 반응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그 의원의 논리를 따라가면 박정희 정권 시기에 중고교를 다닌 그 의원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교육받았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 의원이 민주당의 국회의원이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그런 논리를 따라가면 박정희 정권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니고, 전두환 정권 시기에 중고교를 다닌 나 같은 세대가 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 없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독재가 민주주의로 포장된 시대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유신 찬가를 부르고, 10ㆍ26 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나라가 망했다는 생각을 했던 세대가 아닌가.
교육을 탓하기 전에 여야, 진보와 보수를 떠나, 기성세대가 대한민국을 어떤 세상으로 만들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젊은 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인생에서 제일 큰 고민이 뭐냐고 물어보면 99%가 취업이라고 대답한다. 취업에 대한 좋은 정보가 있을 때 가장 친한 친구에게 알려주겠냐고 물어보면 절반 이상이 알려주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강의 노트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조금 오래된 것 같다. 핀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곳 교육청 사람에게 물은 적이 있다. 핀란드 청년들의 고민은 뭐냐고. 그들의 대답은 참 당황스러웠다. 핀란드 청년들의 고민은 사랑도, 취업도 아닌 “세계 평화와 환경오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유전자가 다른 것인가. 한국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고, 핀란드 청년들은 이타적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생각이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의 낭만은 고사하고 진정한 친구도 사귀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강의의 질이 떨어지고, 등록금이 올라간다는 이유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학내 비정규직 노조와 연대를 거부했던 학생들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면 청년들이 취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든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 기성세대가 아닌가.
진보와 보수진영에 포진하고 있는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각자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다. 진보는 사회가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데 청년들은 왜 세상을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가지 않는지 개탄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저항의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서라는 것이다. 반면 보수는 젊은 세대에게 왜 자기계발을 위해 더 노력하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려운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마음이 여린 기성세대는 “괜찮다”고 위로하며 시간이 지나면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세상이 될 줄 몰랐다. 전(前) 정부의 교육을 탓하고, 다른 무엇에 책임을 돌리기 전에 청년들에게 낭만을 돌려주고, 청년들이 정의를 생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먼저인 것 같다. 어쩌면 정말 그 의원의 말처럼 기성세대가 이런 혹독한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기성세대가 일제강점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