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 거목 문동환 목사 별세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 신학과 교육에서 민중의 미래를 찾으려 했던 목회자이자 신학자.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저술 활동을 이어가며 교계와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 온 문동환 목사가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고인은 1921년 5월 중국 북간도 명동촌 태생이다. 독립신문 기자였던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김신묵 여사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형이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다. ‘동이족의 후예들을 밝히기 위해 일꾼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명동촌은 독립운동과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다. 고인은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과 함께 자라며 민족과 나라에 헌신하는 삶을 꿈꿨다. 7세 때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는 고인은 생전에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했었다.
격동기에 나고 자란 고인은 떠돌이의 삶을 살았다. 193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도쿄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으로 돌아 와 해방을 맞았고, 1947년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조선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다시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고인의 가방에는 성경과 영한 사전, 그리고 태극기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미국 웨스턴 신학교, 프리스턴 신학교를 거쳐 하트퍼드 신학대학에서 종교 교육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1961년 귀국했다. 모교인 한신대 신학과 교수를 지냈고, 미국 유학 중 만난 미국인 헤리엇 페이 핀치백(문혜림) 여사와 결혼했다.
고인은 순탄한 인생을 스스로 버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하고 교육 현장에서 독재정권의 부조리함을 비판했다.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 3ㆍ1민주구국선언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했다. 고인의 연설은 민주화 열망에 커다란 불을 지펴, 대학가 시위로 이어졌다. 고인은 이 일로 22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민중신학에 기반한 민중운동에 천착했고, 석방 이후에도 동일방직 및 YH노조원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고인은 만년 떠돌이였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1979년 한신대에 복직했다가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며 다시 해직됐다.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고인은 1985년 귀국해 한신대로 다시 돌아갔고, 이듬해 정년 퇴임했다. 이후 재야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다 평화민주당(평민당)에 입당했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지인들은 정계 입문을 만류했지만, 고인은 민중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 믿고 정치에 투신했다.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평민당 수석부총재를 지냈고,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고인은 3당 합당에 반대해 정계에서 은퇴한 뒤 1991년 미국으로 돌아 가 아내와 노년을 보냈다. 성서 연구, 특히 민중 신학 연구에 집중했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6ㆍ15남북공동선언실현 재미동포협의회 미국위원장’을 맡는 등 통일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2013년 한국으로 돌아 와 ‘바벨탑과 떠돌이’(2012) ‘예수냐 바울이냐’(2015) ‘두레방 여인들’(2017) 등 최근까지도 책을 썼다. ‘인간이 소외되는 산업시대의 병폐’에 주목한 고인은 ‘소유를 넘어 공유하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를 꿈 꿨다. 세월호 참사, 빈부 격차 등에 목소리를 내면서 한국 사회와 교회에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10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를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는 “감옥에 두 번 가고 교수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또 나가야 했기에 당신 뜻을 펼친 기간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었다며 “생애를 걸쳐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은 저희에게 놀라운 일이었다”고 돌아봤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인 딸 영미, 영혜씨, 아들 창근, 태근씨 등이 있다.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조카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 마석 모란공원. (02) 2227-7500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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