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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전두환과 후예들의 ‘창조적 기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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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전두환과 후예들의 ‘창조적 기억력’

입력
2019.03.0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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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도’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전두환씨와 지만원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합뉴스.
전두환씨와 지만원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합뉴스.

지난주 길을 걷다 난데없이 흰소리를 들었다. “5ㆍ18의 실체가 밝혀지면 문재인 포함 모든 이 땅의 빨갱이 세력이 전부 죽어!” 말이 아닌 말이 쩌렁쩌렁 귓전을 때렸다. 지만원씨였다. 광화문 사거리 인도 위 무대에 '5ㆍ18 북괴군 개입의 진상규명 끝장토론’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수십 명 청중 중 두 명쯤이 말끝마다 박수를 쳤다. 저 땅의 민주주의가 누구의 피땀 위에 섰든 내 알 바 아니라는 양, 지씨가 말을 잇는 초현실적 장면이 어지러웠다. 안 그래도 거리가 흐렸다.

평소와 다른 점은 있었다. 그는 돌연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했다. “다니는 데마다 김진태 붐이 일어났었는데, 이상하게 까보니까 꼴등이야 꼴등. (…) 선관위에 90%가 전부 빨갱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에게 통째로 맡기느냐는 거에요. 이건 시스템적으로 안되는 거에요.” 그는 백주에 정말 이렇게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이게 그의 세계관이다. 5ㆍ18 민주화 운동 관련 망언은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라던 한국당 일각은 이 말에도 ‘선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라 할 수 있을까.

입이 떡 벌어지는 찰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북한군 600명 남파 주장은) 내가 지어낸 게 아니야. 감옥에 가려고? 검찰 최종 보고서에 있는 거에요(…) 지어냈으면 나는 벌써 감옥에 갔어요(…) 내가 얼마나 똑똑한데!” 물론 그런 보고서는 세상에 없다. 정상 사회라면, 이런 말은 진작 허공으로 흩어졌어야 한다. 폭로돼 조각났어야 한다. 숱한 규명이 있는데도 그는 기세 등등하다. 국회 공청회 마이크를 쥐어 주는 등 이 왜곡에 연료를 대는 자가 끝없이 나오는 탓이다. 그 책임을 묻는 처벌과 징계가 무르고 느린 탓이다.

앞서 5ㆍ18 왜곡에 기름을 부은 건 전두환씨다. 전씨는 2016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가 이듬해 4월 펴낸 회고록에선 돌연 지씨의 주장을 인용한다. 법원은 이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들에게 ‘창조적, 선택적 기억력’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전씨는 5ㆍ18 당시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했다 회부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서는 알츠하이머 증세 등을 이유로 출석을 회피했다. 광주지법은 11일 공판을 앞두고 전씨에 대한 구인장을 발부한 상태다.

생전 조 신부는 전씨와 그 후예들의 적반하장을 우려했다. 그는 1990년 7월 가톨릭신문 기고에서 이렇게 썼다. “(전두환) 당신은 이제 역사의 변두리로 물러났지만 그 바통을 이어받은 후배들이 당신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 당신의 역사가 계속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오욕의 역사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피를 짜고 골을 짜는 아픔으로 광주의 진상을 발표하십시오.”

5ㆍ18에 대해 정작 밝혀야 할 것은 헬기사격, 암매장, 인권침해, 사격명령자 등이다. 법원, 검찰, 군, 당국과 언론이 저 집요한 거짓 유포자들보다 무르고 느려선 어려운 일이다. 이번 공판을 또 회피한다면 전씨에 대한 구인영장부터 집행하고 볼 일이다. 재판도 멋대로 회피하는 안락함을 보장하는 한 망언의 시대는 계속된다. 그 후예들의 징계나 재판도 서둘러야 한다. 지씨는 “구속이 안된 게 바로 내가 옳다는 증거”라고 외치고 있다.

조 신부는 같은 기고에서 전씨에게 당부했다. “피로 물든 산천이, 우리의 진실된 역사가 당신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밝혀 고백ㆍ속죄하는 길만이 어둠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영원히 역사의 연극무대 뒤로 사라진 초라한 악역배우이자 희극배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당한 말씀이다. 악역은 할 만큼 했고, 웃기는 건 29만원으로 충분하지 않았나.

김혜영 기획취재부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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