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몸에 좋은 것 좀 주세요”. 지난 1월 방송된 KBS2 주말극 ‘하나뿐인 내 편’에서 도란(유이)이 약국을 방문해 보약을 찾자 약사는 기다렸다는 듯 “이건 어떠세요?”라며 큰 박스에 든 한방 건강 상품을 추천한다. 20~30대 여성이 약국에 들어가 무턱대고 몸에 좋은 약을 달라고 하는 경우는 과연 얼마나 될까. 손님에게 어디가 안 좋은지 묻지도 않고 건강보조제를 추천하는 약사의 모습도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보인다. 건강보조제 관련 에피소드는 66초나 전파를 탔다. 의약품 제조사가 드라마 제작을 지원해 벌어진 일이다.
‘하나뿐인 내 편’은 ‘막장’ 전개뿐 아니라 지나친 간접광고(PPL)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프로그램 시청자게시판엔 ‘PPL 좀 작작 하세요’(김**), ‘국민에게 시청료(TV수신료) 받아 특정회사 홍보 하지 마라’(복**) 등의 쓴소리가 올라왔다. 시청률 50%에 육박하는 공영방송 주말극의 일그러진 뒷모습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깨는 엉뚱한 설정과 제품 홍보성 대사가 범람하다 보니 드라마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변칙 중간광고 도입 후 심의 위반 늘어
지상파 방송(KBSㆍMBCㆍSBS) 드라마의 PPL이 도를 넘으면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지상파 방송은 변칙 중간광고 집행으로 새로운 수익원을 찾았으면서도 무분별한 PPL엔 손을 놓고 있다. 지상파 방송은 콘텐츠의 질 향상을 위해 중간광고의 공식 도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이런 주장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선 과도한 PPL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상파는 2017년부터 프로그램을 1,2부로 나누고 중간에 광고를 넣는 이른바 ‘프리미엄 광고(PCM)’를 내보내고 있다. 5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지상파 3사의 광고효과 위반 등 제재 건수는 총 15건이다. PCM을 도입한 2017년 12건과 비교해 오히려 3건이 늘었다.
주인공 직업까지 결정
PPL은 주인공의 직업과 이름까지 결정한다. 지난 3일 종방한 MBC 드라마 ‘내 사랑 치유기’에서 남자 주인공인 최진유(연정훈)는 패션업체 A사를 보유한 한수그룹 상무로 나온다. A사는 이 드라마 제작 지원사다. 지상파 드라마의 약 70%는 주인공 직업이 광고주와 관련돼 있다. 미디어 비평 단체인 서울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가 지난해 10월 ‘하나뿐인 내 편’을 비롯해 지상파 드라마 17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4개가 연관돼 있었다. 유명 드라마 제작사에서 20여 년 동안 일한 한 제작프로듀서는 “워낙 채널이 다양해지고 작품이 늘어 10여 년과 비교하면 PPL 수익이 반 토막 나 요즘엔 작품 당 많아야 20억원 수준”이라며 “(경쟁이 심해지면서) 수익 확보 차원에서 광고 노출 수위가 세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PPL 피해서 넷플릭스로
PPL의 영향이 커지면서 드라마의 ‘홈쇼핑 광고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공영방송 드라마에 ‘인간 PPL’까지 등장했다. KBS2 일일 드라마 ‘다 잘될 거야’에서는 건강식품회사의 실제 회장이 출연자로 등장해 시청자를 황당하게 했다. 김치 제조사가 협찬사로 참여한 MBC 일일 아침극 ‘모두 다 김치’엔 장모가 사위의 따귀를 김치로 때리는 장면이 나왔다. 지상파 방송이 제작비 확보 차원에서 무리하게 PPL을 하다 보니 드라마에 비상식적 상황 연출이 잦아졌다.
지상파 드라마가 PPL로 얼룩지자 작가와 배우들은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업체(OTT)인 넷플릭스 등 PPL 압박이 덜한 플랫폼으로 눈길을 돌리는 추세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사극인 ‘킹덤’(1월 공개)엔 PPL이 단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 ‘킹덤’의 김은희 작가는 “PPL을 신경 쓸 필요 없어 자유롭게 글을 썼다”고 말했다. 배우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15년 동안 일한 한 관계자는 “요즘엔 드라마에 PPL 브랜드가 노골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배우가 따로 찍거나 이미 계약한 광고와 충돌이 생겨 난처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며 “유명 배우들은 작품 완성도를 위해 PPL 제약이 덜한 매체의 작품을 선호한다”고 귀띔했다.
‘PPL 폭탄’ 마지막 회에 몰리는 이유
작가 대부분은 PPL을 종방 직전에 대량 방출한다. 제재를 받더라도 방송이 다 끝난 후라 파장이 덜하기 때문이다. 피해를 보는 건 시청자다. 한석현 서울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팀장은 “요즘엔 드라마 1~2부 사이에 들어가는 (변칙적인 중간)광고에 출연 배우 광고가 들어가고 작품 세트 등과 연계되는 광고까지 제작돼 시청자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며 “광고 규제 완화 뒤 방송사를 비롯해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계 기관의 PPL 수위 관련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꼬집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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