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6> 49년 만에 읽어본 이종암 추도문
1970년 서울 을지로 흥사단 건물 강당에서 조촐한 추도식이 열렸다. 40년 전 세상을 떠난 의열단원 이종암(1896~1930ㆍ본명 이종순ㆍ일명 양건호) 의사를 늦게나마 기리기 위해 동생 이종범(사망)씨가 동분서주해 꾸린 자리였다. 당시 이 행사에 참석했던 이종암 의사의 손자 이정근(75)씨는 할아버지 기일이었던 음력 5월의 어느 봄날로 기억한다. 기념사진을 보면 참석자는 고작 8명. 이들 중 두 명은 의열단(義烈團) 창립 단원 신철휴(1898~1980) 지사와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석우 채충식(1892~1980) 선생이었던 것 같지만, 정확하지는 않다고 했다.
이정근씨는 사진 몇 장과 신철휴ㆍ채충식 선생이 써준 추도문 형식의 한시를 보관해왔으나, 49년간 해석해 깊숙이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가족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 할아버지에 대한 주된 생각은 자랑스러움보다 미움이었다고 한다. 한국일보는 그 추도문을 받아 박희병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에게 해석을 의뢰했다. 일제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던, 검사가 의열단 부단장이라 칭했던 이종암에 대한 동료들의 49년 묵은 단심이 마침내 빛을 봤다.
“일생을 울분으로 보내며 심사 항상 격했으니, 20년을 갇혀 살아 한이 끝이 없었으리”(신철휴 지사), “상전벽해가 되니 세상일을 어이 견디리, 눈바람 치는 요하(만주) 길 몇 번이나 올랐네”(채충식 선생). 두 사람은 추도문에서 이종암 의사가 일제 치하에서 살았던 20년을 감옥으로 표현하고 만주와 국내를 오갔던 그의 고달픈 독립운동의 여정을 기렸다. 먼저 떠난 동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미안함이 가득했다.
◇의열단원이 의열단원에게 전한 추도시
신철휴 지사가 남긴 추도문에선 의열단원들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이종암 의사와 신철휴 지사는 의열단 창단 때부터 함께한 초기 멤버이다. ‘이종암 공을 추모함’이라는 제목이 달린 이 추도문은 ‘거사할 당초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거늘(當初擧事死生同), 오늘 이 애통한 마음 뉘와 더불어 나누리(是日哀情孰與通)/ 위험한 일로 여겨 비록 의를 저버리긴 했으나(已識險危雖負義ㆍ시를 쓴 자신이 거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적을 이르는 말), 성공하여 의당 공을 논하리라 기대했다오(惟期成就宜論功ㆍ공의 거사가 성공하기를 바랐다는 뜻)/일생을 울분으로 보내며 심사 항상 격했으니(一生鬱憤心常激), 20년을 갇혀 살아 한이 끝이 없었으리(廿載囹圄恨未窮ㆍ1910년 국망 때부터 1930년 순국 때까지 일제강점기의 삶을 감옥으로 여긴 말)/ 와병으로 추모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나(臥病不叅追慕席), 자꾸만 흐르는 피눈물이 붉게 몸을 적시네(數行血淚使人紅)/이승의 동지 신철휴 삼가 씀(在世人 同志 申喆休 謹稿)’이라고 돼 있다.
신철휴 지사는 1920년 초 의열단이 첫 국내 일제공격 거사를 기획했을 때 곽재기(1893~1952) 등 동지들과 만주에서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입국, 폭파거사를 계획하던 중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신철휴 지사는 1925년 7월 병으로 가출옥했는데, 이종암 의사가 홀로 기획했던 도쿄 거사의 뜻을 알았으나 적극 함께 참여하지 못했던 회한을 추모시에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추모시를 쓸 당시 의열단 창단 동지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채충식 선생의 추도문은 ‘종암 의사는 재주를 갖추어(鍾巖義士備才能), 어려서부터 일본의 기관을 엿봤네(覘視機關自少曾ㆍ폭탄을 투척하려고 엿봤다는 말)/상전벽해가 되니 세상일을 어이 견디리(大局滄桑堪世涉), 눈바람 치는 요하(만주) 길 몇 번이나 올랐네(遼河風雪幾程登)/의사가 순국한 지 어언 40년(殉國居然四十秋), 만당의 사람들 오열해 눈물을 멈추기 어렵네(滿堂嗚咽淚難收)/누가 큰 붓으로 아름다운 기록을 남기리(誰能大筆遺芳錄), 살아남기 어려운데 뒤에 죽어 부끄럽네(十死九生後死羞)/이승에 남은, 도움이 안 되는 벗 채충식 삼가 씀(在世損友 蔡忠植 謹稿)’으로 돼 있다. 대구 출신으로 이종암 지사와 동향인 채충식 선생의 글은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이종암 지사의 모습과 바람 찬 만주의 눈길을 수없이 오가며 감행했던 고달픈 독립운동가의 길, 그리고 순국한 의사와 달리 아직 살아있는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도 담겨 있다.
◇은행원에서 독립운동가의 길로
1917년 12월, 대구은행의 21세 출납계 주임 이종암이 은행 돈 1만500원(1만900원이라는 기록도 있음)을 들고 종적을 감췄다(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제7권). 대구 달성군 출신의 그는 침착하고 과단성 있고 일을 철저히 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1914년 은행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출납계 주임이 된 터였다. 독립운동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말이 적고 웃음이 없었다. 어린 시절 이종암은 붙잡힌 의병들이 포승에 엮이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고 하니(김영범, 시대의 불의에 온몸으로 맞선 의열투사 이종암), 마음속 분노와 독립운동의 꿈이 웃음기를 없앴는지도 모른다.
2년 후 이종암 의사는 중국 지린성(吉林城)에서 의열단 창단 멤버로 이름을 올렸고, 그가 가지고 나온 은행 돈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여졌다. 의열단의 투쟁사를 보면 어느 하나 비극이 덜한 사건이 없지만, 1922년 이종암이 가담했던 일제 군부의 거물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 암살 계획 실패는 가장 안타까운 사건으로 꼽힌다. 의열단은 이 거사 성공을 위해 ‘3중 트랩’ 작전을 썼다. 3월 28일 다나카 대장이 상하이 황푸탄(黃浦灘) 부두에 도착하자 오성륜(1900~1947)이 먼저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명중되지 않았고, 이어 김익상(1895~1941)이 폭탄을 던지고 이어 권총을 연사했다. 이도 명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국 여인 톰슨 부인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제3선의 투탄 저격수로 이종암이 나서 폭탄을 던져 다나카가 타고 달아나는 자동차 앞바퀴를 맞췄으나 불발됐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체포됐고 이종암은 군중 사이로 숨어 붙잡히지 않았다(독립운동사 7권 및 시대의 불의에 온몸으로 맞선 의열투사 이종암).
이종암 의사는 앞서 1920년 창단 후 첫 국내 총공격 작전에서 단원들이 대거 붙잡힌 뒤 입국, 붙잡히지 않은 동지들과 최수봉(1894~1921ㆍ사형)의 밀양경찰서 투탄 거사를 기획하고 폭탄 제조에 가담했고, 1925년 7월 단신으로 밀입국해서는 1만원의 자금을 모아 홀로 도쿄로 가서 폭탄 거사를 감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입국 후 체포됐으며, 국내에서 그와 연락하거나 만났던 11명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1년간의 신문과 고문 끝에 이종암ㆍ고인덕ㆍ배중세ㆍ한봉인 4명에게 예심에서 유죄가 결정됐다. 그리고 그때야 일제는 사건 전모를 공개했고, 동아일보ㆍ조선일보 등에 ‘경북 의열단사건’으로 이름 붙여 크게 보도됐다. 그는 공판에서 재판장을 향해 “우리 조선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혁명을 불가불 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라고 질타했다(독립운동사 7권).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서(의열단선언서)’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말에 대한 답이었다. 이종암 의사는 국내 들어올 때 폭탄 두 개와 권총 및 탄환 50발, 조선혁명선언서 100매를 가지고 왔다. 그는 과거 폭탄을 얻으려 했던 행적에 대한 질문에는 “책임 맡은 동지가 있기는 하지만 날짜가 자꾸만 지연되어 내가 직접 가지고 가서 총독부고 무어고 죄다 파괴해 버리려고 그랬다”(1920년 의열단의 첫 번째 총공격 계획을 말함)고 말했다.
◇일제 “시신은 밭 구석이나 길가에 묻으라”
이종암 의사는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1892~1926) 의사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세례를 주던 그날 그 시간에 13년 형의 선고를 받고 대전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이종범, 의열단부장 이종암전). 이종암 의사의 동생 이종범씨가 1970년 쓴 책에는 “예심 1년여 동안 혹독한 악형(고문)에 시달리고 감옥의 냉방, 악의악식(惡衣惡食), 고역에 지칠 대로 지쳐 복역한 지 4년 만에 마침내 허약증을 일으켜 결핵으로 변했다”고 돼 있다. 다 죽게 되었을 무렵 가출옥을 시켜 나온 지 한 달 만에 숨졌다. 1930년 6월 10일이었다(출소 후 열흘 후인 5월 29일 숨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죽기 전에도 경찰이 매일 몇 번씩 와서 죽었나 안 죽었는가를 살폈고, 죽은 후에는 일체의 장례 절차를 밟지 못하게 했다. 즉 곡(哭)도 못 하게, 불경도 못 읽게, 기도도 못 드리게 하고 회장(會葬)도 못하게 하고 무덤(봉분)도 못 쓰게 했다. 꼭 화장을 해야 된다고 했다. 어느 밭 구석이나 길가에 묻어 버리라고 했고, 대구 달서구 압산의 어느 밭에 묻었다고 한다. 이정근 씨는 “몇 년 후에 수해가 나서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묻은 곳도 어딘지 알 수 없게 됐다고 할머니께 들었다”고 말했다.
함께 붙잡힌 동지들의 최후도 비참했다. 1920년 폭탄을 제조해 최수봉에게 넘겨 밀양경찰서 사건을 조력한 대가로 옥살이를 하고, 다시 이종암과 함께 붙잡힌 고인덕(1887~1926)은 선고 전 옥에서 자결했다. 1926년 12월 23일 동아일보는 ‘고인덕은 21일 밤 대구형무소 병감(病監)에서 사망하였는데 상세한 것은 아직 미상하다더라’고 썼다. 1920년 국내에 반입한 폭탄을 곽재기에게서 받았던 의열단 조력자 그룹의 배중세(1893~1944)는 당시에는 체포되지 않았지만 이종암을 숨겨 준 혐의로 이번에는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후 이듬해 옥사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고 거사를 조력하던 한봉인(1898~1968)은 당시 징역 8개월(집행유예 2년)을 받았고, 4명 중 유일하게 광복을 목격했다.
1915년 결혼한 이종암 의사가 은행 돈을 가지고 사라질 때 부인 서희안씨는 임신 5개월째였다. 서씨는 이종암 의사가 붙잡히고 나서 “나의 친정이나 시댁이 모두 빈곤하여 나는 지금 무의무탁한 처지에 있습니다. 물론 고생살이지요. 그러나 나의 남편이 지금 철창에 있다는 것을 매양 생각할 때는 지금 나의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아무리 고달픈 살림을 한다 하여도 저 어린 것은(아들 태수군을 가리키며) 세상없어도 공부를 시켜야 하겠기에 지금 대구 공립보통학교에 통학시키는 중입니다”(동아일보, 1926년 11월 13일)라고 했다. 이정근씨는 “할아버지가 떠난 후 거의 접선하는 식으로 세 번 정도 할머니를 만났다”며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때문에) 당시 친척들도 싫어하고 사상가의 부인이라고 할머니를 멀리했다”고 말했다. 이정근씨는 할머니에 대해 ‘누군가 매화 같은 분’이라고 표현했다며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지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는 미워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우울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젊은 며느리를 출가시키고 자신을 홀로 키우신 할머니의 수고로운 인생은 할아버지 때문으로 여겨졌다. 그는 “더구나 과거에는 의열단이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누명을 쓰고, 독립운동사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다”며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우리 학교에도 위대한 집안 자손이 있다’고 나를 향해 전교생이 박수를 치도록 했는데 그때도 별로 뿌듯함을 못 느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달 14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기자에게서 추도문 풀이를 건네받고 관심 있게 읽어 보는 모습이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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