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1932년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쟁 참전을 위해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
박 명예회장은 전쟁 당시 통신병으로 비밀훈련을 받고 암호를 취급하는 부서에 배치된 후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조용한 성품 때문이었는지, 그는 이 같은 사실을 주변에 잘 얘기를 하지 않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뒤늦은 2014년 5월이 돼서야 6.25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 받았다.
◇‘남의 밥 먹는 것’부터 시작…두산에서 첫 업무는 공장 청소
군을 전역한 그는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1960년 4월 한국산업은행에 공채 6기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첫 시작을 두산그룹이 아닌 산업은행을 택한 데에는 선친 박두병 그룹 초대회장이 있었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라는 게 선친의 뜻이었다.
3년 동안 은행 생활을 한 박 명예회장은 63년 4월 마침내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이후 선진적인 경영을 잇따라 도입하며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고 한양식품,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새로운 시도, 부단한 혁신…’글로벌 두산’ 기틀 닦아
두산그룹 회장이 된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두산그룹 출신 한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85년에는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 두산기술원, 두산렌탈, 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잇따라 설립했다. 74년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 사장에 취임해 세계적인 통신사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부단한 혁신을 시도한 리더기도 했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의 혁신이 대표적이다.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이어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이 같은 선제적인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게 그룹 내 공통의 평가다.
◇몸에 밴 겸손…”분수를 지켜라”
박 명예회장은 어려서부터 선친에게서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면서, “내가 먼저 양보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주변 인사들은 전한다. 그는 또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품고 살았는데, ‘수분가화(守分家和)’를 가훈으로 삼는 건 물론 형제와 자녀들에게 ‘수분가화’라는 붓글씨가 적힌 액자를 선물하곤 했다. ‘수분가화’는 ‘자신의 분수를 지켜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뜻으로 자녀에게 선물한 액자에는 ‘능력 범위 안에서 행동하라’ ‘조금씩 양보하고 참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가정에서의 모습에 대해 유족들은 “아내에 대해 평생 각별한 사랑을 쏟은 남자”로 기억한다. 부인 고(故) 이응숙 여사와는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여사는 박 명예회장에게 있어 인생의 ‘동반자’이자 ‘조언자’였다. 하지만, 이 여사는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박 명예회장은 암 투병 중이던 부인의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간병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 떠나 보낸 아내를 한결 같이 그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23년 간의 ‘사부곡((思婦曲)을 써내려 왔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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