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은 도전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연방헌법이 비준되고 100여년이 지나도록 미국인들에게 수정헌법 1조(표현의 자유)의 가치는 선언적이거나 명목적이었다. 그 조항에, 나아가 ‘권리장전’의 가치에 비로소 주목하게 된 게 1차대전 직후인 1919년이었고, 그해 두 건의 기념비적 헌법 판결의 중심에 전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1841.3.8~1935.3.6)가 있었다.
하나가 그해 3월의 ‘생크 판결(Schenck V. United States)’이었다. 1차대전 징병을 거부하라며 전단을 배포해 간첩법(Espionage Act, 1917)과 내란 선동법(Sedition Act, 1918)으로 유죄가 선고된 피고들의 항소심에서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검찰을 편들었다. 판결문에서 홈즈는 저 유명한 ‘극장의 비유’와 “명백하고 임박한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의 논거를 제시했다. “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극장에서 허위로 불이야 라고 소리쳐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야기한 사람을 법으로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례에 있어 문제는, 연방의회가 막을 권리가 있는 실제적인 악을 가져올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을 지닌 상황에서 혹은 그런 의도를 지니고 그 발언이 이루어졌는지 여부입니다.”
불과 8개월 뒤인 11월 10일, 러시아혁명에 개입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팸플릿을 뿌려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들의 상고심 판결(Abrams v. U.S)에서 홈즈는 정반대의 소수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진실에 대한 개인의 생각은 시장의 경쟁을 통해 진위가 판단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실험이듯이 헌법도 실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의견의 표현을 억압하려는 시도를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한 표현들이 법의 정당하고 강압적인 목적을 위협하여 즉시 제어해야만 국가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을 유도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는 정치인 친구들과 동료들의 집요한 로비를 겪으며 거꾸로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법무부가 반대자를 억압하기 위해 얼마나 교묘히 연방법률을 이용하는지, 그들의 역량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료 판사 3명이 그의 집에까지 찾아와 볼셰비키와 노동운동의 위협에 대해, 미국의 취약함에 대해 설명하며 그를 설득했다. 그가 저 판결문을 읽기 불과 사흘 전 일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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