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아파트 보수공사 담합과 관련해 500여건의 비리를 적발하고도 5년간 시간을 끌다 처벌시효를 넘겨 사실상 봐 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최근 서울중앙지검은 이를 포함한 내부고발 사건을 공정거래조사부에 배당하고 정식 수사 절차에 착수했다.
고발인인 유선주 공정위 심판관리관(국장급)에 따르면 공정위는 노후 아파트 단지들이 시설유지 공사 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 담합 비리가 상당하다는 지적에 따라 2013년 대대적인 실태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지난해 시효 도과 직전 50여건만 과징금 부과 등 처벌하고, 나머지 대다수 사건은 처벌하지 않았다는 게 유 국장의 주장이다. 유 국장은 “무혐의 종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 대부분은 형사처벌을 위한 공소시효(5년) 및 과징금 부과 등에 필요한 처분시효(신고로부터 5년)가 지난해 종료됐다”고 말했다.
유 국장은 공정위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590건의 담합행위를 파악하고 이 가운데 468건을 ‘직접적인 담합 단서가 있는 중요사건’으로 분류했다는 내부 자료를 검찰에 제출했다. 자료에 따르면 공정위는 2013년 신고자를 통해 담합행위 400여건의 협의과정, 견적파일 등 상세자료를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 보수공사 담합 사건에 대한 공정위의 늑장 처분이 직권 남용에 해당하는지를 두고는 법조계 의견이 갈린다. “고의로 사건 처리를 미루거나 무혐의 처리한 것이 아니라면 직원 개개인의 형사 책임이 성립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차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고 사건을 종결했거나, 내부 문제제기와 권한 박탈과의 인과관계가 성립될 경우 직권남용죄가 성립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 담당자는 “5년 동안 조사를 진행해 담합 합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한 사건만 과징금 부과 등 처벌했다”면서 “증거가 부족한 입찰 건은 사건이 되지 않아 지난해 종결했다”고 해명했다.
형사처벌 여부를 떠나 이 참에 공정위의 늑장 처분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해 상반기 공정위가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담합 사건 14건 중 12건은 공소시효를 3개월도 남기지 않은 상태였고, 공소시효가 완성돼 처벌을 면한 기업이 2017년 9곳이나 됐다. 지난해 가습기 살균제 업체들에게 내린 과징금 처분을 두고 “처분시효가 지나 위법하다”는 법원 판결도 연달아 나왔다.
앞서 유 국장은 공정위의 담합 사건 미처리 실태를 잇따라 지적한 데 대한 보복으로 각종 권한을 박탈했다며 공정위 수뇌부를 직무유기ㆍ직권남용 등 혐의로 고발했다. 그는 “의결서 결재 과정에서 관련 실태를 직원들로부터 보고 받아 공정위 수뇌부 앞에서 문제를 제기했지만, 오히려 의결서 작성ㆍ검토 권한을 박탈당했다”면서 “공익 침해행위가 계속될 우려가 있어 공익 신고에 나섰다”는 입장이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