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생명 창업주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 대산(大山) 신용호(1917~2003)가 우리나라 보험산업의 선구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사업가 기질 덕분만은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나고 자라 일제의 핍박에 고통 받던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민족 사업가’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가 그의 ‘보험 외길’을 이끌었다.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 사업가로서 신용호 창업주의 발자취가 다시금 주목 받고 있다.
27일 교보생명 등에 따르면 신용호 창업주는 1917년 전남 영암군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신예범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야학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일본인 지주의 농민수탈에 항의하는 소작쟁의를 주동하다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일본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큰 형인 신용국 선생은 일본인 소작인 응징과 항일 만세운동을 주도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런 공훈을 인정 받아 지난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전남 영암 농민항일운동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항일 운동에 투신하는 집안에서 독학으로 초ㆍ중ㆍ고교 과정을 마친 신용호 창업주는 스무 살이던 1937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 해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다롄, 베이징 등지에서 사업에 매진하는 가운데 현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포도’ ‘교목’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일제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와의 만남은 신용호 창업주가 국가와 민족에 눈을 뜨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인은 신용호 창업주에게 경술국치 이전 조선에서 벌어진 난맥상을 거론하며 사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드시 큰 사업가가 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겠다”고 다짐하는 신용호 창업주에게 시인은 “모쪼록 대사업가가 되어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라네”라며 격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용호 창업주는 1940년 베이징에 곡물 유통업체 ‘북일공사’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뒀고 수익 중 많은 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용호 창업주는 우수한 인재를 기르고 민족자본을 형성해 경제 자립의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1958년 세워진 교보생명의 창립철학이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보생명의 교육보험은 창업주의 철학을 구현한 대표적 상품이다. 회사 창립과 동시에 선보인 교육보험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진학보험’, 쉽게 말해 대학 학자금 보험상품이었다. 출시 이후 30년간 300만 명의 학생이 이 상품을 통해 학자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 사회가 ‘대학 진학은 돈 많은 집안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금세 벗은 것도 이 상품의 공이라는 평이다.
창업주 별세 후 배턴을 이어받은 아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선대가 일궈놓은 창립철학을 교보문고, 대산문화재단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연간 5,000만 명이 방문하는 ‘국민책방’ 교보문고는 한국을 찾은 국빈들이 꼭 거쳐가는 대표적 명소이자 문화공간이 됐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후원하는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번역ㆍ출판 사업은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는 쾌거로 이어졌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