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새 대표 황교안이 걸어온 길
검사 시절엔 ‘미스터 국가보안법’으로
27일 자유한국당 신임 대표로 선출된 황교안(62) 전 국무총리는 박근혜 정부 ‘탄핵총리’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제1야당의 당권을 거머쥐면서 대권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한 입지전적 인물이 됐다. 올 1월 15일 입당한 정치신인치고는 ‘화려한 재기이자 변신’이다.
그는 검사장,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로 이어지는 ‘승진 사다리’를 치고 올라간 관운만 누린 것으로 세간에 인식되는 편이지만 그늘진 여정도 없지 않았다. 그가 당 안팎의 공격과 우려에 비교적 의연히 대응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켜 온 것도 어린 시절 고생이 밑거름이 됐다. 스스로도 이번에 당권에 도전하면서 “중도 하차할 만큼 나약하게 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 만리재 고개 인근 고물상집 출신인 그가 검사가 된 계기도“집안 배경이 없어서”였다. 6남매 중 막내여서 경기고 재학 중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할 거 같다는 고민을 모친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다. 그러다 사법시험만 붙으면 자수성가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공부에 매진했다. 여기에 “사회가 바른 방향을 잡도록 기여하겠다”는 청년의 포부가 더해져 검사 꿈을 키웠다고 한다.
고교 때는 반장, 학생회장에 이어 학도호국단 연대장으로 활동했다. 반공사상교육을 위해 조직된 학생자치단체였다. 동창인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반(反) 유신운동을 하며 저항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노 의원은 수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가치관이 변한 게 없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공안검사’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검사 초기 근무하던 서울지검의 공안부에 결원이 생겨 파견가면서 우연히 발을 들였고, 점차 헌법 수호 가치에 강한 확신을 품게 됐다. 검사 황교안은 이후 별명이 ‘미스터 국가보안법’일 만큼 공안통이 됐다. 대검찰청 공안1ㆍ3과장과 서울지검 공안2부장, 서울중앙지검 2차장 등 공안검사의 요직만 두루 거쳤다. 한때 공안수사의 바이블로 불린 ‘국가보안법 해설’이란 책도 썼다.
하지만 잘 나가던 그는 검찰의 꽃인 검사장 승진에서 연거푸 좌절했다. 노무현 정부 때다. 그는 2005년 서울중앙지검 2차장 재직 시절 수사 지휘한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보법 위반 사건을 “검사장 승진에 걸림돌이 된 일”이라고 꼽는다.“내 삶의 가장 큰 파란을 일으킨 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는 ‘6ㆍ25는 북한의 통일전쟁’이란 글을 기고한 강 교수 사건에서 구속수사 의지를 밀어붙이다 불구속 수사 지휘권을 발동한 천정배 당시 법무부 장관과 갈등을 빚었다. 물론 검사장 승진 누락이 실력파가 두루 포진한 사법연수원 13기 동기간 경쟁의 결과였을 뿐이란 반론도 나온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검사장이 됐다.
그가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데는 풍부한 공안수사 경력 못지않게 노무현 정부 때 밉보여 좌천된 것으로 비친 점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인사청문회 때는 변호사 시절 ‘미공개 자문 사건 수임 19건’ 등 갖은 논란이 있었지만 종교적 편향성 논란이 특히 주목 받았다. 공안검사 못지 않게 개신교 전도사인 황 대표는 워낙 독실한 기독교인 이미지가 강하다. 색소폰 애호가로 음반도 낼 정도로 실력파다.
△서울 출생 △경기고ㆍ성균관대 법학 석사 △대검 공안1ㆍ3과장ㆍ서울중앙지검 공안2부 부장검사ㆍ2차장 △박근혜 정부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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