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리적 구토’의 탄생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1899년 여름, 미국인 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스(1870~1958)는 카메라와 영사기를 다룰 서너명의 일행을 이끌고 서울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그의 여행기에 따르면 일행이 찍은 영상을 왕족인 청안군 이재순(1851~1904)이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이재순은 활동사진, 즉 영화를 경험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던 셈이다. 개화의 물결과 함께 찾아온 이 근대문물에 매혹된 이재순은 고종 황제에게도 영화를 권유하였고, 고종 또한 진기한 구경거리에 흡족해하며 홈스 일행에게 하사품을 내리고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을 공개한지 불과 4년 만에 영화는 지구 반대편 조선땅에 도달한 것이다.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한 영화 상영은 그보다 늦은 1903년 6월경에 확인된다. 그해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창고에서 설렁탕 한 그릇 값인 10전을 받고 저녁 8시부터 두 시간 동안 세계 각지의 풍광을 담은 활동사진을 틀었는데, 그때마다 인파가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1912년 북촌 종로통에 우미관이 설립되고 1918년에는 박승필이 창덕궁 입구의 단성사를 인수해 상설영화관으로 개조할 즈음엔 영화는 한국의 대중들이 향유하는 일상 문화로서 깊게 파고들었다. 비록 수입된 필름을 받아서 트는데 그치는 수준이었지만,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한국의 영화가 등장할 기운은 차츰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10월 26일 단성사의 주인이 된 박승필은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이 광고를 낸다. “조선에 활동사진극이 없어 항상 유감스럽게 여기던 바, 한번 신파 활동사진을 경성의 제일 명승지에서 촬영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오천원의 거액을 투자 (중략) 27일부터 대대적으로 상영하오니 활동사진을 좋아하는 여러분께선 한 번 보실만한 것 올시다. 조선 신파의 활동사진은 요즘이나 옛을 통해 처음입니다.” 이 광고가 말하는 ’조선 신파의 활동사진‘은 바로 김도산(1891~1921)의 ‘의리적 구토’(1919)이었으며,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가 태동하는 순간을 알리는 작지만 큰 신호탄이었다.
‘의리적 구토’의 출발은 연극이었다. 소설가 이인직의 문하생으로 문학도의 길을 걷던 김도산은 연극의 경험을 쌓고 약관 26세의 나이에 극단 신극좌를 결성한다. 신극좌는 1919년 7월 4일부터 5일간 우미관에서 ‘의리적 구토’를 공연했는데 박승필은 이때 연극을 보고 김도산을 주목한다. 그와 뜻이 맞았던 김도산은 신극좌를 단성사로 옮겨 ‘의기남아’와‘자기의 죄’를 무대 공연하면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다. 서로 합을 맞춘 연출가 김도산과 제작자 박승필의 다음 목표는 바로 영화였다. 일본인 극장주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극장계에서 단성사를 지키며 홀로 고군분투하던 박승필은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낸 영상 예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미국과 프랑스, 일본 영화가 극장가를 지배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우리 영화를 기대하는 기류가 관객들로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김도산이 연극 ‘의리적 구토’를 영상으로 옮길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일본의 신파극단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가 내한 공연한 활동사진 연쇄극 ‘선장의 처’를 본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키노 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불리는 활동사진 연쇄극은 활동사진과 연극 연기를 절충한 형태의 공연예술로 연극 무대의 뒤에 스크린을 설치한 뒤 배우들이 연기를 하다가 극장 무대 안에서 재현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넘어가면 영화를 교대로 상영하는 방식이었다. 신파극의 인기가 침체되어 불황기에 접어들고 있던 조선 공연계에 있어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신종예술 연쇄극은 어려운 국면을 돌파할 새로운 흥행요소로 보였던 것이다.
‘의리적 구토’를 제작함에 있어서 박승필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영화 제작의 기반이 없다시피 했다. 영화 제작을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는데, 이 어려운 상황은 당시 5,000원이란 거금을 과감히 출자한 박승필의 결단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 잘 사는 부자의 집 재산이 1,000원 정도이던 시절이었다. 단성사를 막 인수할 무렵 박승필은 직원 하나를 일본으로 파견해 촬영술을 공부하게 지원했는데, 이 직원이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가 되는 이필우이다. 그가 귀국할 때 들여온 촬영기자재가 고스란히 ‘의리적 구토’에 투입되었으며, 김도산 또한 영사기를 구입하기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을 때 2주간 영사 기술을 익혔다. 다만 기술적 숙련도을 요구하는 촬영과 편집 부문은 일본인 미야카와 하야노스케(宮川早之助)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단성사와 영화공급 계약을 체결했던 일본 영화사 덴카츠(天活)에 소속된 촬영기사였다.
배우로는 주인공 송산 역에 감독과 각본까지 맡았던 김도산 본인, 결의형제 죽산 역에는 이경환, 매초 역에 윤화, 계모 역은 여장 남배우 김영덕이 맡았다(여배우가 직접 배역을 연기하게 된 첫 한국 영화는 ‘호열자’(1920)다.) 이와 같이 ‘의리적 구토’는 한국인 배우와 제작진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 영화였다. 35㎜ 필름 한 권 분량의 짧은 무성영화였지만, 배경과 풍물만을 담은 것이 아닌, 배우의 연기와 스토리텔링이 갖추어져 극으로서의 요소가 충분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필름은 소실되어 전모를 온전히 파악할 순 없지만, 남아있는 문헌에 따르면 8막 28장으로 구성된 ‘의리적 구토’의 스토리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은 전형적인 활극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난 송산은 모친을 일찍 여의고 계모의 슬하에서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다. 재산을 탐내는 계모와 그 일당의 괴롭힘을 묵묵히 견디며 술로 세월을 보내던 송산은 뜻이 맞는 동지 죽산을 만나 결의형제를 맺고 동지들을 포섭하게 된다. 마침내 집안을 파탄 내려는 계모의 계략이 극에 달했을 때, 송산은 응징의 칼을 뽑기로 결심한다.
연극과 결합된 과도기적 형태이긴 했지만 ‘의리적 구토’는 조선인 배우가 등장하는 조선의 영화라는 사실만으로 큰 화제가 되었고 흥행에 대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박승필은 단성사 안에 촬영 전담 부서를 세웠고, 김도산의 차기작들인 ‘시우정’(1919), ‘형사고심’(1919), ‘의적’(1920) 등 연쇄극 작품의 제작을 잇달아 지원하면서 초기 형태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확립한다. 엄연한 극의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조선 영화가 탄생했으며, 더 나아가 민족 자본 주도의 영화 제작 시스템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의리적 구토’가 첫 선을 보인 1919년 10월 27일은 한국영화사의 원년(元年)이 된 것이다. 10월 27일이 ‘영화의 날’로 지정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같은 날 단성사에선 ‘의리적 구토’와 동시 상영으로 서울시와 근교 명승지의 풍광을 촬영한 한국 최초의 기록영화 ‘경성 전시의 경(景)’(1919)이 공개되었다. 이 역시 1919년을 한국 영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
공교롭게도 ‘의리적 구토’가 공개된 1919년은 3ㆍ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도 3ㆍ1 운동의 사회적 여파가 남아있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가 이 작품의 줄거리에는 제국주의의 압제 치하를 견디면서 저항과 독립정신을 견지하고자 했던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시대정신이 묻어나 있다는 인상을 준다. 활동사진 연쇄극 자체가 신기한 구경거리이기도 했겠지만, 아마 관객들은 국권을 빼앗긴 현실을 계모가 장악한 집안에 포개며 불의를 응징하는 송산에게 한껏 감정을 이입했으리라. 한국영화사 100주년을 맞는 2019년이다. 비록 김도산은 ‘의리적 구토’ 개봉 2년 뒤인 1921년 7월 26일,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늑막염으로 세상을 떴지만, 암울한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한국영화의 첫 횃불을 피워 올린 그 작업의 의의는 결코 잊혀선 안될 것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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