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계속되어야 하지만
이념적 피해자 만들지 말길
‘피해자다움’은 복합적인 것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사건에서 ‘미투’의 미묘함이 드러나고 있다. 1심에선 무죄, 2심에서는 유죄 판결이 나왔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사건에서 상반된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다 안희정씨의 부인 민주원씨가 “이번 사건은 용기 있는 미투가 아니라 불륜사건”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민주원씨가 더 큰 피해자로 인정되는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2만 개 이상의 격려 댓글을 쓴 사람들은 남자만이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도 동참했다.
그러자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김지은씨를 유일한 피해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다시 반발했다. 최근 한 일간지 기자도 김지은씨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민주원씨의 발언이 ‘여성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런데 민주원씨를 공격하는 그 기사는 그녀의 발언을 성범죄자 가족의 관행적인 태도라며 폄하할 뿐 아니라 법조계 의견도 비틀어버리고 있다. 법조계는 그러나 “이 같은 민씨의 행동이 성범죄자 가족이 보이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더 나아가면, 기사는 사실 왜곡에 가깝다. 피해 여성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가해남성을 두둔하는 방식은 불행히도 친족 성폭력 범죄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그러나 민주원씨가 가해 남성을 두둔하고 있는가? 아니다. 민씨는 두둔하지 않는다. “안희정씨에게는 지금보다 더 심한 모욕과 비난, 돌팔매질을 하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일방적인 미투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프레임은 과거에 ‘불륜’ 사건에서 두드러졌고 여성에게 불리했을 수는 있다. 그런데 미투 운동에서도 그 프레임은 작동한다. 본인의 의도와 반대로 여성 기자 스스로도 여성에게 여성이 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지은씨 편을 들면서 기자는 민주원씨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보편적 동질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남성의 성희롱이나 폭력은 처벌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지만, ‘미투’의 이름으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을 대립적으로 일반화하지는 말자. 또 남성에 의한 성폭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정관계를 전적으로 부인할 필요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때로는 단순할 수 있지만, 실제의 인간관계에서는 얼마든지 복합적인 삼각관계로 나타날 수 있다.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섣불리 불륜과 성폭력 사이에서 택일을 할 필요는 없지만, 김지은씨만이 미투 운동에 딱 맞는 유일하고 순수한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여러 정황적 증거(김지은씨가 보낸 문자, 그녀가 슬립을 입고 있었다는 민씨의 증언 등)를 살펴보면, 불륜도 상당한 정도로 사실로 보인다.
처음에 김지은씨가 피해자로 나섰을 때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의가 있었지만, 피해자다움을 너무 요구하지 말라는 주장이 더 힘을 받았다.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 남성 앞에서 언제나 즉시 그리고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어쩌지 못한 채 한 동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면서, 미묘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가해자와 얽혀 있을 수 있다. 부부나 연인들 가운데서도 폭행에 시달리면서도 참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심지어 납치된 여성들이 가해자에 대해 미묘한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심리학적 사실이다.
그런데 피해자의 이 복합성은 당연하게도 김지은씨뿐 아니라, 민주원씨에게도 적용된다. ‘미투’의 이름으로 그녀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김지은씨만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이 그렇게 쉽게 민주원씨를 공격하는 모습이라니! 여성 일반에 대한 남성의 폭력만을 부각시키는 ‘미투’는 불륜이나 애정관계의 미묘함은 지우고, 쓸데없이 젠더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다.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미투’ 운동에 방해가 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사실의 폭력성을 인식하면서, 그것은 제대로 지속할 수 있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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