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밀양 영남루와 잃어버린 읍성
미세먼지와 희뿌연 안개가 농밀한 햇살을 대신한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밀양(密陽)을 ‘비밀스러운 볕’이라 해석했다.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한 답이다. 실제 밀양이 그렇다. 특별할 것 없지만 들여다볼수록 빠져든다.
◇영남루, 밀양 여행의 시작과 끝
밀양 여행의 시작과 끝은 영남루(嶺南樓)다. 시내 중심이고 밀양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전망이 빼어난데다 무엇보다 건물 자체의 풍모가 남다르다.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경덕왕(742~765) 때 신라의 5대 사찰이었다는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건물에서 유래해 고려 공민왕 때인 1365년 밀양부사 김주가 규모를 키워 중수하고, 현재의 누각은 1844년 이인재 부사가 중건한 것이다.
뒤편 마당으로 들어서면 당당한 풍모의 누각에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루’ 좌우로 ‘강좌웅부(江左雄府)’ ‘교남명루(嶠南名樓)’라 쓰여 있다. 각각이 어른 키보다 큰 열한 글자를 품고도 처마가 여유 있다. 강좌웅부는 낙동강 동쪽의 큰 고을, 즉 밀양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교남명루는 마루가 넓은 누대라는 뜻이니 역시 영남루의 넉넉함을 담은 표현이다.
내부에도 대형 편액이 여럿 걸려 있다. 정면 처마 안쪽의 ‘영남루’와 천장의 ‘영남제일루’ 편액은 이인재 부사의 아들 현석과 증석이 각각 7세와 11세 때 쓴 것으로 알려져 놀라움을 자아낸다. 획의 굵기로 미루어 또래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큰 붓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돼 서예가들 사이에서도 불가사의로 여겨진다. 아마 글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 외에도 온 사방이 트여 넓게 보인다는 뜻의 ‘현창관(顯敞觀)’, 강과 누대가 어울려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의미의 ‘강성여화(江城如畵)’, 금빛 모래가 용솟음친다고 비유한 ‘용금루(湧金樓)’ 편액도 걸려 있다. 모두 영남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경치, 또는 주변과 조화를 이룬 누각의 풍광을 읊은 것들이다.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문익점 등 문필가들의 시문 현판도 즐비하다. 그 중에서 이색의 시는 영남루의 옛 정취를 짐작하게 한다. ‘영남루 아래 큰 내가 비껴 흐르니, 가을 달 봄 바람이 태평스럽구나. 갑자기 눈에 은어가 삼삼하니 선비들의 웃음소리 귀에 들리는 듯하구나.’ 이순공 문화해설사의 해석이다. 요즘은 영남루 야경을 밀양 8경 중에서 으뜸으로 치지만, 강물에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 기둥(月柱)에 비할까. 영남루에서 훤히 보일 정도로 밀양강엔 은어가 많았던 모양이다. 이에 착안해 밀양시에서 매년 양식 은어를 방생하지만, 기대만큼 효과는 없는 듯하다. 어릴 때에는 바다에서 지내고 이른 봄에 강을 거슬러 오르는 어종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의 낙동강은 은어의 서식 환경과 너무 멀어졌다. 하구둑부터 막혀 은어도 바닷물도 밀양까지 오르지 못한다. 스물네 개의 커다란 기둥이 떠받치는 넓디넓은 마루는 연회장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왼편 계단을 통해 누대에 오르면 어디선가 은은한 풍악 소리가 들릴 듯하다.
◇잃어버린 밀양읍성의 모습이 파리의 박물관에…
영남루는 주변에 ‘밀양의 전설’을 두루 품고 있다. 영남루 뒤편에는 단군을 비롯해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여덟 왕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이 자리한다. 조선 현종 6년(1665)년에 세운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57년 정문(만덕문)을 더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영남루 아래 양지바른 곳에는 ‘아랑사당’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랑은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로, 유모와 함께 영남루로 달 구경을 나왔다가 괴한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몸을 던져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그러나 ‘아랑’은 실제가 아니라 전설(소설) 속 인물이다. 주변에는 대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뤄 더없이 아늑하고, 바로 아래 밀양강은 한없이 푸르다. 아랑의 꽃다운 넋을 위로라도 하는 것일까. 사당 아래 바위에는 모란꽃 봉오리처럼 석화(石花)가 피었다. 지질학적 해석보다 훨씬 낭만적이지만, 유교적 정절을 교훈으로 삼고자 사당까지 세운 노력이 요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영남루 옆 아동산(衙東山, 밀양읍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자락에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생가와 노래비가 있다.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낭랑 십팔세’ 등 수많은 히트곡 중에 비석에는 ‘애수의 소야곡’이 악보와 함께 새겨졌다. 박시춘 생가 옆에는 사명대사(1544~1610)의 동상도 있다. 밀양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와 관련된 유물이 전국에 흩어져 있어 덩그렇게 홀로선 동상이 다소 뜬금없이 보인다. 바로 옆 깎아지른 절벽에는 무봉사(舞鳳寺)가 자리 잡았다. 터가 손바닥만 해 전각 2~3채가 전부다. 천년고찰 치고는 자연히 소박할 수밖에 없는데, 대신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밀양강의 풍광이 일품이다. 어떤 새든 안개 낀 강 위에 날개를 펼치면 절로 봉황의 춤사위가 될 듯하다.
무봉사에서 산길로 조금 오르면 밀양읍성의 흔적이 나타난다. 예전 읍성의 돌들은 모두 헐려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 교량 공사에 사용됐고, 현재 일부 복원한 석축은 투박하기만 해 옛 정취를 느끼기 어렵다. 문성남 문화해설사는 프랑스 파리의 기메(Guimet) 박물관에서 밀양읍성의 옛 모습을 담은 그림을 접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의 여행가 샤를바라가 쓴 ‘조선기행’에는 밀양읍성 남문과 조화를 이룬 초가집들이 정겹게 남아 있다. 그는 독일 뉘른베르크 성과 함께 밀양읍성을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 극찬했다고 한다. 영남루에서 가까운 밀양관아도 2010년 복원했지만 생동감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앞이 ‘밀양아리랑시장’이어서 ‘근민헌(近民軒)’이라는 현판처럼 일상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점은 다행이다.
하기야 옛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 밀양읍성뿐이겠는가. 영남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삼문동은 밀양강이 두 가닥으로 갈라졌다 모이는 지형으로, 공중에서 보면 둥그런 섬이다. 그러나 현재는 전체 강줄기를 파악할 수 없다.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아파트가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대신 5.6km 섬 둘레에는 천연 방제림 솔숲이 남아 있고, 조각공원과 퍼블릭골프장 등을 조성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기 좋다. 육지 속 섬, 삼문동을 한 바퀴 돌아 해질 무렵 영남루 아래 강가에 앉았다. 강변을 장식한 청사초롱 가로등과 조명을 받은 영남루가 밀양강에 비쳐 유유히 흐른다. 이색의 ‘달빛 기둥’에 미치지 못해도 밀양의 자부심으로 손색이 없다.
밀양=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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