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철 사회복지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라는 아버지 유언 따라 사회복지사 됐죠”
“아버지의 심장이 멈추고 심장박동기가 ‘삐이’하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습니다.”
2005년 1월,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철강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는 백혈병 진단을 받고서도 한동안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골수이식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재발했고, 결국 병을 이기지 못했다. 안현철(33) 제일기독종합사회복지관 선임사회복지사는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년 동안 불쑥 불쑥 치미는 슬픔과 분노에 시달렸고, 그 이후엔 진로에 대한 고민이 공포처럼 밀려왔다”고 고백했다.
“중학교 때 소위 일진들과 어울렸어요. 오토바이를 타다가 친구가 트럭에 깔려 죽는 걸 바로 옆에서 목격하기도 했어요.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죠.”
아버지의 유언이 진로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조언이 되었다.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남겼다. 당부라기보다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 입학금과 등록금 모두 아르바이트로 마련
“허헛, 니가?”
담임선생님에게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단 말을 했을 때 처음 보인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신이 번쩍 들긴 했지만 공부에 파고들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한 상태로 1년을 흘려보내고 만 거였다.
1차 수시를 목표로 잡고 말 그대로 짐승처럼 공부했다. 담임선생님이 보인 반응에 오기가 발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야간자율학습과 학원을 빼먹지 않았다. 당시 별명이 ‘갑자기 모범생’이었다. 돌변한 그를 어색해하는 친구도 많았지만,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은 응원을 해주었다. “혹시 수학 문제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하고 말해주었던 친구도 있었다. 나중에 안 복지사가 그의 성적을 초월해버려서 머쓱한 상황이 연출됐지만 “그 마음만큼은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차 수시전형에 합격했지만 그 뒤로 다시 전쟁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곧장 편의점으로 달려갔고 방학 때는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입학금과 등록금 모두 아르바이트로 마련했다.
“졸업을 1년 유예하고 유럽에 배낭여행을 다녀오는 게 유행이었어요. 학생들이니만큼 최대한 저렴하게 다녀오는 여행이었지만 그럼에도 저에겐 언감생심이었죠. 집안이 생활보호대상이었고 어머니가 자활근로사업으로 근근이 생활비를 벌고 계셨거든요.”
단 하루라도 빨리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4학년 1학기 때 교수 추천으로 장애인 그룹홈에서 보조교사로 활동하며 사회복지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7시부터 08시까지 생활지도를 하고, 그 외 시간에 학교수업과 ‘사회복지사1급’ 시험 준비를 병행했다.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현재 근무하고 있는 제일기독종합사회복지관 공개채용에 합격할 수 있었다.
◇ 당장의 결과보다 씨앗을 뿌려야
사회복지사가 된 후 자연스럽게 청소년 사업을 담당하게 됐다. 현장에 뛰어들어보니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이 모두 재산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저를 ‘인생의 롤모델’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누구보다 방황했고, 잘못된 삶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말 그대로 죽을 둥 살 둥 노력했으니까요. 아무리 ‘삐딱이’라도 제 이야기를 들려주면 ‘이 선생님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을 열어요.”
몇 해 전에는 자신과 너무도 비슷한 학생을 만났다. 3학년 2학기에 퇴학을 당한 친구였다. 우스갯소리로 3년 동안 아침마다 집에 가서 학교까지 ‘배달’을 시켜줬지만 결국 퇴학을 당했다. 그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절망이었다. 반전이 찾아온 건 2년 뒤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계절이 일곱 번쯤 바뀌었을 때 이 친구가 불쑥 복지관으로 찾아왔어요. 저에게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 제가 처음 보인 반응이 이거였어요. ‘니가?’ 그렇게 정성을 쏟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 학생은 “선생님이 나의 롤모델”이라고 했다. 그 친구 덕분에 일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공을 들인 만큼 결과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생각만큼 안 따라와 주면 실망하고 회의감을 느낄 때가 많았어요. 이젠 씨앗을 뿌린다는 생각이에요. 내가 정성껏 씨앗을 뿌려두면 언젠가 비가 오고 햇볕이 나서 발아할 거라고 믿는 거죠. 뒤늦게 찾아와서 저를 ‘롤모델’이라고 한 그 친구처럼요.”
◇ 부부는 가장 작은 사회
안 복지사는 부모님들에게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는 “방황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부모님이 서로 대화가 없는 경우가 많더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가 사회성을 배울 첫 기회입니다. 부부가 좋은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당연히 여러 결핍에 시달립니다. 가정에서 나쁜 씨앗을 뿌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복지사의 역할도 가정과 사회의 끈을 이어주는 역할이다. 때로 아버지처럼, 때로는 사회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보듬고 품어주는 것은 부모의 몫을 대신하는 것이다. 반면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인생 선배로서의 역할이다.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사회복지사란 본업 외에 레크리에이션 자격증을 획득했고, 대구시 ‘시민기자단’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사진 찍는 것과 글쓰기, 여행을 좋아해 여행 블로그도 운영 중이다. 지금은 유튜브 쪽으로 관심을 확장했다. 사회복지사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이 모든 활동의 목적은 하나다. “아이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 훌륭한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저는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부모님, 선생님, 인생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셋 중의 한 요소만 잘 만나도 삐딱한 삶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어요. 저 같은 사회복지사는 두 번째(선생님) 안전판 역할을 하는 거죠.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신정미 객원기자(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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