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위법일 땐 의무 없는 일 맞다”
‘댓글 공작’ 1심서 징역 3년 선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수사와 구속 단계에서 직권남용 혐의를 부인하는 사유로 줄곧 ‘사실 행위에 대한 지시’를 들었다. 법원행정처 등에 지시한 검토보고서 등이 직권남용 혐의의 최대 쟁점인 ‘부하 직원에게 시킨 의무 없는 일’과는 상관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최근 비슷한 쟁점을 다투는 재판에서 이런 주장이 잇따라 배척되고 있어 사법농단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직권남용죄)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배득식 전 기무사령관의 재판이 대표적이다. 부대원들로 구성된 댓글 공작 조직을 운영하며 여권지지, 야권 반대 등 정치관여 글 2만여건을 온라인상에 게시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배 전 사령관은 재판에서 △부대원들은 상명하복 원칙에 따라 상급자의 직무를 보조하는 사실행위를 한 것에 불과하다거나 △부대원들이 직권을 남용해 의무 없는 일을 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배 전 사령관의 전략은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해 하급자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했을 때’ 성립하는 직권남용 혐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배 전 기무사령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지시에 따라 사실행위를 했다고 해도 내용이 위법하면 ‘의무 없는 일’이 맞다고 판단했다. 배 전 사령관의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이순형)는 “형식적ㆍ외형적으로 기무사령부의 직무집행으로 보인다 해도 실질적으로 정당한 권한에 속하지 않은 위법ㆍ부당한 행위를 하도록 했다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직권남용 상대방의 위법성 인식여부는 직권남용죄의 객관적 구성요건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공무원의 직권행사에 따라 직권남용 상대방이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거나 △권리를 방해 받았다면 결과적으로 국가기능의 공정한 행사라는 국가적 법익에 대한 침해가 발생하고, 직권남용 상대방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 받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양 전 대법원장의 직권남용 혐의 부인 주장도 기본적으로는 배 전 사령관의 재판 전략과 다르지 않다. 양 전 대법원장도 최근 법원에 낸 보석청구서에서 △하급자에게 검토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은 사실행위를 지시한 것에 불과해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상ㆍ하급 공무원이 직무수행 행위의 위법성을 인식하지 못해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배 전 사령관 1심 결과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이 안심할 상황은 아닌 셈이다.
부하 직원들에게 ‘챙겨보라고 했을 뿐’이라며 직권남용 혐의를 부인하는 박병대 전 대법관의 재판 전략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기획재정부에 예산안 압박을 넣었다는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박 전 대법관처럼 “‘잘 살펴봐달라’고 한 것에 불과하고, 직무권한에 기대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음에 불구하고 재판부가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 전 수석의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김대업)는 “3선 국회의원 출신이자 청와대 근무경력도 있는 피고인은 자신이 요구할 경우 공무원들이 거절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단순 의견 제시를 넘어 자신의 영향력을 적극 활용했다”고 봤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박 전 대법관 또한 상명하복 문화가 분명한 법원행정처에서 심의관들이 자신의 지시를 거절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검토보고서 등을 보고 받은 정황도 있어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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