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렸다. 허벅지가 터지도록 페달을 밟았다. 울퉁불퉁 흙바닥인 경기장 500m 트랙을 1만번 넘게 돌았다. 훈련부터 촬영까지 자전거로 달린 거리가 무려 2만㎞. 지구 반 바퀴 거리다. “너무나 지치고 힘들었어요.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 수십 번도 넘게 생각했죠. 그런데 어쩌겠어요. 끝은 봐야죠. 이미 출연계약서에 서명도 했고. 하하.”
열심히 하기로 배우 정지훈(37)을 따라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27일 개봉)을 기획하고 제작한 배우 이범수가 왜 가장 먼저 정지훈에게 시나리오를 건넸는지 알 듯하다. 2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정지훈은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다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며 “이 인물을 알리는 일이 뜻 깊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일제강점기에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1위를 하며 동아시아에 이름을 떨친 실존 인물 엄복동을 다룬다. 영화에선 시골 물장수였던 엄복동이 식민지 민중을 위로한 스포츠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정지훈은 “엄복동이 민족적 신념을 품고 뛰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자전거가 좋아서 열심히 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 준 건지, 실제 마음이 무척 궁금했다”며 “사료가 충분하지 않은 실존 인물을 표현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가수 비’를 지워 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무대에서 보여준 카리스마가 무심코 배어 나올까 봐 스스로 경계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엄복동은 어떤 사람일까,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얼굴이 빨개졌을까 아니면 ‘헤헤’ 웃었을까,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그리고 모든 장면마다 어떤 식으로 연기할지 여러 버전으로 구상해 정리해 뒀죠.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리허설을 해 보고, 그 예시들 중에 가장 잘 맞는 표현법을 선택했어요. 익숙한 연기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었죠.”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잡음이 많았다. 견해 차이로 감독이 촬영 도중 이탈했다가 다시 합류했고, 실제 엄복동이 말년에 자전거 절도 혐의로 옥살이를 한 사실도 알려졌다. 정지훈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며 “억지로 감추거나 에둘러 가지 않고 혼날 건 혼나고 칭찬받을 건 칭찬받고 싶다”고 말했다. 또 “엄복동이 왜 말년에 그런 삶을 살았는지 이유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고 덧붙였다.
정지훈을 스크린에서 만나기는 2012년 ‘알투비 : 리턴 투 베이스’ 이후 7년 만이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촬영했고, JTBC 드라마 ‘스케치’(2018)와 SBS ‘돌아와요 아저씨’(2016)에도 출연했다. 가수로도 아시아 전역의 무대에 섰다. 데뷔 이후 20년간 톱스타였던 그는 “앞으로는 정지훈이라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 시간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응원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이젠 노력으로 평가받을 단계는 지났어요. ‘너 배고프진 않잖아, 냉정히 평가받아야지’라는 시선도 느껴집니다. 화려한 퍼포먼스를 하는 가수, 연기도 제법 하는 배우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지훈이라는 사람의 인간미로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어요.”
정지훈은 2017년 배우 김태희와 결혼해 딸을 뒀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에 대해 자랑도 하고 싶지만, 좋은 의미로 꺼낸 이야기가 칼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며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예의 같다”고 조심스러워했다.
아빠이자 남편인 정지훈은 꽁꽁 숨겨 뒀지만, 배우이자 가수인 정지훈을 만날 기회는 앞으로 더 많아질 듯하다. 그는 “코미디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출연 제안을 받아 곧 차기작을 결정할 생각”이라며 “올해 말 새 앨범 발매와 콘서트도 계획돼 있다”고 전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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