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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양승태 대법이 외면한 보도연맹 69년만에 피해자 배상 한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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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양승태 대법이 외면한 보도연맹 69년만에 피해자 배상 한 풀다

입력
2019.02.22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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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1950년 희생된 김용현씨의 영정사진. 24세였던 1945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양기 제공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1950년 희생된 김용현씨의 영정사진. 24세였던 1945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양기 제공

“주문. 재심 대상 판결을 취소한다.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 김양기에게 1억3,600만원과 그 이자를 지급하라”

지난 20일 서울고법의 승소 판결문을 받아 든 김양기(69)씨는 아버지 고 김용현(1921~1950)씨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김씨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셔서 정작 살아 생전엔 얼굴 한번 못 본 아버지였다. 사진 속 아버지는 이승만 정부가 죽이고 양승태 대법원이 외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피해자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받기 위해 김씨는 7번의 판결을 받아야 했다.

김씨는 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으로만 알았다. 그러다 친척을 만나러 일본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1986년 광주 505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43일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됐다. 그를 조총련계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고문하던 수사관이 “네 아버지도 여수순천사건에 가담했다가 붙잡혔고 전쟁 발발 직후 처형됐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받고 5년 넘게 수감된 뒤 석방됐다. 당시 김씨가 기소된 조총련 간첩 조직 사건은 총책이 8살 아이로 지목되어 있을 정도로 엉터리 조작 사건이었지만 그랬다. 야만의 시대였다.

김씨는 아버지의 행적을 좇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5일 전직 교사였던 아버지는 전남 여수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구금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구금된 47명의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인근 무인도 ‘애기섬’에 끌려가 집단 총살된 뒤 바다에 버려졌다.

1995년 광주지검이 김양기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사건기록 열람등사 요청에 보낸 불허가통지. “외부로 유출될 경우 불필요한 새로운 분쟁이 야기될 우려가 있다” “재심사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불허이유가 담겼다. 김양기 제공
1995년 광주지검이 김양기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사건기록 열람등사 요청에 보낸 불허가통지. “외부로 유출될 경우 불필요한 새로운 분쟁이 야기될 우려가 있다” “재심사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불허이유가 담겼다. 김양기 제공

최소 10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꼽힌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1949년 좌익 혐의자 관리 등을 위해 만든 관변단체였으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무차별 학살대상 단체로 변질됐다. 연좌제 고통 속에 모두가 쉬쉬했다. 김씨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잘 몰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씨는 자신의 혐의부터 벗어야 했다. 2009년 광주고법 재심 재판부는 “최후의 인권 수호기관인 법원이 5번에 걸친 재판을 벌였음에도 피고인과 그 변호인들의 주장에 눈과 귀를 막은 채 공허한 증거들이 그려낸 허상만을 바라보았다”며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푸는 데는 더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로 아버지를 인정했으나 뒤따르는 보상 입법이 없어 배상을 받을 수 없었다. 법 제정을 기다리다 김씨는 2012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ㆍ2심에선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13년 11월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이 판결을 뒤집었다. 김씨가 진실규명 통지서를 받은 날인 2009년 9월 11일이 아니라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2009년 8월 18일을 기준으로 손해배상 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봤다. 김씨가 소송을 제기한 것은 2012년 8월 22일이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났으니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판결했다. ‘안 날’을 피해 당사자들이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날로 간주하는 민사소송의 흔한 판례에 어긋나는 이례적 판결이었다. 국가범죄 인정에 인색한 보수적 양승태 대법원의 꼼수라는 비판이 일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부친을 잃은 유족 김양기씨. 김양기 제공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부친을 잃은 유족 김양기씨. 김양기 제공

그래도 대법원의 판결은 판결. 김씨는 헌법소원을 내야 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8월 “민법 766조의 객관적 시효를 과거사정리법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국가배상청구권의 보장 필요성을 외면한 것”이라며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따라 김씨는 재심을 신청, 마침내 서울고법 민사3부(부장 심준보)는 지난 15일 김씨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헌재 결정 이후 처음 나온 재심 판결이다. 아버지가 죽은 지 69년, 소송을 제기한 지 7년만의 일이다.

김씨는 “양승태 대법원의 판단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느냐”며 “한시라도 빨리 특별법을 만들어 국가폭력에 희생되고도 말 못하는 이들의 한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보도연맹 피해 유족 김양기씨 父子 판결 일지_박구원 기자
보도연맹 피해 유족 김양기씨 父子 판결 일지_박구원 기자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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