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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노포기행] 제주 어멍들의 삶 고스란히 담긴 고소리술… 4대째 명맥 잇다

입력
2019.02.23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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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주 술 익는 집

[저작권 한국일보] 김희숙 제주 술 익는 집 대표가 양조장에서 술을 내린 후 고소리 등 도구를 정리하고 있다. 김영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김희숙 제주 술 익는 집 대표가 양조장에서 술을 내린 후 고소리 등 도구를 정리하고 있다. 김영헌 기자.

“옛날 제주 어멍(어머니)들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집안일을 한 다음 고소리술을 닦아수다(내렸습니다). 우리 어멍도 지친 몸으로 밤새 꾸벅꾸벅 졸면서 고소리술을 닦다가 새벽녘이 돼서야 방안에 들어와 옆에 누우면 어멍 몸에서 술 냄새가 퍼져 나왔는데, 그 냄새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어수다(없습니다).”

김희숙(60) ‘제주 술 익는 집’ 대표는 “고소리술이 어떤 술이냐”는 질문에 어릴 적 기억부터 꺼내 들었다. 그는 “20년 넘게 해오던 공무원 생활을 접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선택한 이유도 어릴 적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술 냄새 때문”이라며 “고소리술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제주 고소리술은 어머니의 향이 배어있다고 해서 ‘모향주(母香酒)’라고 하거나, 힘든 삶을 버텨야 했던 어머니들의 한이 담겨 있어 ‘한주(恨酒)’라고도 불린다.

옛날 육지와 떨어진 제주섬 속에의 생활은 항상 식량이 부족하고 물품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자급자족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제주의 여인들은 집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물질을 하거나, 밭일을 하면서 식량을 조달했다. 또 명절이나 경조사 등 큰일에 필요한 고기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돗통시(돼지우리와 화장실을 합쳐놓은 공간)에 돼지를 키웠고, 손님들에게 대접할 술도 빚어 고팡(창고의 제주어) 속에 저장해뒀다. 이 모든 일의 대부분을 제주 여인들은 억척스럽게 해냈다. 김 대표는 “어머니 세대까지는 대부분 집에서 술을 직접 빚었다. 먹을 목적도 있지만 돈벌이도 됐다. 술을 빚어 제주시내 술상회에 갖다 팔아 식량이나 필요한 가재도구를 샀다. 지금은 내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에게 배운 방법대로 술을 빚어 팔고 있다. 어머니의 삶이 담긴 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김희숙 제주 술 익는 집 대표와 아들 강한샘씨, 며느리 김소연씨가 고소리술 체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김희숙 제주 술 익는 집 대표와 아들 강한샘씨, 며느리 김소연씨가 고소리술 체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4대째 역사 이어가는 ‘제주 술 익는 집’

‘술 익는 집’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일제강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세를 넘겨 장수한 1대 이성화(1888~1989) 할머니는 현재 제주성읍민속마을이 위치한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마을에서 10대를 살아온 강씨 가문에 시집을 왔다. 이 할머니는 일본으로 유학을 간 두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막을 차렸고, 직접 빚은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을 팔았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세금 부과를 위해 가양주(家釀酒) 제조를 금지해 고소리술 명맥이 끊길 뻔 했지만 이 할머니는 자신만의 술 제조법을 며느리인 2대 김을정(94) 할머니에게 고스란히 전승했다. 1995년에는 고소리술을 빚어온 가계의 전통과 제조기술을 인정받아 김 할머니가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1호 고소리술 기능보유자로 지정됐고, 그 명맥은 고소리술 전수교육조교인 며느리인 김 대표로 다시 이어졌다. 그는 “시어머니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본격적으로 고소리술 빚는 법을 배웠다. 당시에는 전통주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술을 빚기 위해 23년간 잘 다니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둔다고 하니 주위에서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고소리술의 명맥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앞으로 전통주를 알아주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더 컸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시어머니에게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제조법을 전수받은 것은 물론 몇 년 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인 김여옥(1920~2012) 할머니에게도 강주, 오합주 등 다양한 제주 전래 민속주 빚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법만으로 술을 빚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 그는 다시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해 발효 등 식품공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국내 전통주 연구소들도 찾아다니며 술 연구에 몰두했다. 전통시장에서도 그는 스승(?)을 찾아다녔다. 오일장에 나온 나이 든 할머니들에게 술 빚는 방법을 물어보고 술 제조법을 하나씩 정리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술 익는 집을 만들었다. 그는 “흔한 취미 하나 없이 25년간 술에 푹 빠져 살았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무엇보다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아 너무 힘이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몇 년 전부터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 고소리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고 크게 반겼다.

술 익는 집은 현재 김 대표에서 4대로 넘어가는 단계다. 김 대표의 3남 중 막내인 강한샘(32)씨가 고소리술 전수생으로 김 대표의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강씨는 “고소리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때부터이며, 현재 10년이 넘어간다. 중간에 1년쯤 다른 진로를 고민했지만 다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우리 세대에서 고소리술 명맥이 끊기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고소리술 전승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김희숙 제주 술 익는 집 대표가 양조장에서 고소리를 이용해 술을 내리고 있다. 제주 술 익는 집 제공.
[저작권 한국일보]김희숙 제주 술 익는 집 대표가 양조장에서 고소리를 이용해 술을 내리고 있다. 제주 술 익는 집 제공.
[저작권 한국일보]제주 술 익는 집은 고소리술을 메밀고구마범벅과 고사리, 별떡 등 제주 전통음식과 함께 시음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제주 술 익는 집은 고소리술을 메밀고구마범벅과 고사리, 별떡 등 제주 전통음식과 함께 시음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제주의 자연과 세월이 빚어낸 명품주

술 익는 집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인근에 있다. 2004년 성읍민속마을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전통 초가집이다. 제주조릿대로 흙을 바르고 삼나무와 돌 등의 주재료다. 어느 가을 태풍에 초가지붕이 날아간 이후 지붕만 개량했다. 이곳은 당초 고소리술 전수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집을 지었지만, 지금은 양조장과 술 빚는 체험장, 카페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 대표와 아들 한샘씨의 하루 일과는 오전 6시30분쯤부터 시작된다. 고소리술을 빚고, 숙성하고 있는 고소리술을 담은 술독만 정리해도 아침해가 후딱 지나간다. 고소리술을 빚는 일은 100% 수작업으로 이뤄지며, 복잡하고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고소리는 오메기술을 증류시켜 소주를 내릴 때 사용하는 옹기인 ‘소줏고리’를 뜻하는 말이다. 고소리술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김 대표는 “제주에서는 3,000~4,000여년 전 탐라국 시대부터 탁주를 담가 마셨고, 고려 말 몽골 지배를 받으면서 증류 기법이 들어와 탁주를 활용한 고소리술을 만들기 시작했다”며 “제주 고소리술은 과거 개성소주, 안동소주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주로 명성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고소리술은 오메기(좁쌀의 제주어)술을 원재료로 만든 증류식 소주다. 좁쌀과 보리쌀로 만든 오메기떡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키면 막걸리와 비슷한 탁주인 오메기술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메기술 위에 맑은술만 걸러낸 것이 오메기청주고, 오메기술을 원재료로 만든 증류식 소주가 고소리술이다. 오메기술을 무쇠솥에 위에 얹은 ‘고소리’에 넣은 뒤 열을 가하면, 데워진 고소리 안에서 알코올이 증기로 변한다. 이 때 고소리 윗부분에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인 ‘장탱이(넓은 옹기그릇을 뜻하는 제주어)’에 찬물을 부어주면 ‘결로현상’으로 인해 증기가 이슬로 변해 코끼리 코 모양의 고소리 코를 통해 흘러 내린다. 이를 작은 허벅(물을 길을 때 쓰는 항아리)에 받아낸 후 ‘술춘’이라는 술보관용 항아리에 모아담아 서늘한 곳에서 숙성기간을 거치게 된다. 김 대표는 “술은 섭씨 78도에서 기체로 변하기 때문에 불 조절이 까다롭다. 술을 내릴 때는 긴장한 채 고소리 앞을 잘 지켜봐야 한다”며 “그리고 처음 내린 술은 독하고 맛이 거칠기 때문에 시간으로 맛을 살려내야 한다. 2년 정도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켜야 하며, 오래 묵을수록 맛은 더욱 깊어진다”고 말했다.

숙성된 고소리술은 알콜도수가 40도에 이르는 독주이지만 마실 때 부드럽고 목넘김이 좋고, 고소리술 특유의 과실향과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김 대표와 한샘씨가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수작업과 일체의 첨가물이나 감미료를 넣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빚는 고소리술은 연간 4.8톤 정도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공만 들고 돈은 별로 안되는 셈이다. 김 대표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만들 수 있는 양이 한계가 있다. 기계를 사용한다면 대량으로 만들 수 있지만, 원래의 술맛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전통기법으로 술을 빚고 있다. 돈보다는 술의 품질이 우선”이라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같은 고집스런 노력 때문이지 술 익는 집의 진심은 여러 곳에서 인정받고 있다. 2017년 대한민국주류대상에서 ‘우리술 약주ㆍ청주’부문에서 대상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하는 ‘2018년 찾아가는 양조장’에도 선정됐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김 대표가 농식품부로부터 주류분야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됐다. 고소리술 원형 복원과 제조기능 연구에 전념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작권 한국일보]제주 고소리술은 최소 2년 정도 숙성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사진은 제주 술 익는 집 한쪽에서 숙성 중인 고소리술.
[저작권 한국일보]제주 고소리술은 최소 2년 정도 숙성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사진은 제주 술 익는 집 한쪽에서 숙성 중인 고소리술.

△또다시 100년을 꿈꾼다

술 익는 집의 역사는 1대 이 할머니부터 4대인 한샘씨까지 어림잡아 100년은 넘는다. 하지만 김 대표의 욕심은 고소리술이 더 오랜 시간 전통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때문에 그는 2013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성읍마을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고소리술 빚는 법을 가르치는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김 대표에게 배운 제자만 170명에 이른다. 제자 중에는 생업으로 고소리술을 빚는 경우는 없지만 고소리술에 대한 관심은 예전보다 크게 달라졌다. 그는 “옛날 제주 어멍들 대부분이 간단한 도구만을 갖고도 고소리술 등을 직접 빚어 왔다. 지금 세대들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후세들의 관심이 고소리술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할 길”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또 고소리술을 전승하기 위해서는 현재 술 익는 집의 상업적 성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행히 수년전부터 전통주가 인기를 끌면서 고소리술 판매도 크게 늘고 있다. 현재 술 익는 집에서 제조한 고소리술과 오메기 맑은술은 서울과 경기 일대 호텔과 음식점에 납품되고 있고, 개인에게는 온라인으로만 판매하고 있다. 술 판매 외에도 술 익는 집을 방문해 직접 술을 빚고, 메밀고구마범벅 등 제주 전통 음식과 함께 술을 시음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도 활성화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1, 2대 할머니들까지는 빚은 고소리술은 가양주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소리술이 계속 제주의 대표 전통주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술만 빚어도 최소한 먹고 살수는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며 “이 때문에 6~7년 전부터 아들과 함께 양조장을 정비하는 등 100년을 더 내다보고 변화를 주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고소리술의 맛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제주 술 익는 집 전경.
[저작권 한국일보]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제주 술 익는 집 전경.

제주=글·사진 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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