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지시ㆍ언어폭력, 왜 참아야하나요?” 공직 풍경 바꾸는 밀레니얼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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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 지시ㆍ언어폭력, 왜 참아야하나요?” 공직 풍경 바꾸는 밀레니얼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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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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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안정성보단 자기만족도 중시… 불합리한 관행 바꾸거나, 박차고 나가 ‘새 삶’

불과 10년 전이였다면 침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공공기관과 기업에 입사한 신입들은 불의를 참지 않는다. 마땅한 대응을 망설이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 2000년대 초 출생 세대) 신입들 덕분에 조직문화가 바뀌고 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새내기 공무원입니다. 매일 벌어지는 일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선배님들께 현명한 답변을 구합니다.”

최근 한 도청 익명게시판은 어느 신입 공무원의 호소로 와글댔다. 성희롱성 발언,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 부당한 업무지시 등 그가 겪은 일들이 담긴 글은 게재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조회 수 3,000건을 넘어섰고 수십 건의 댓글이 달렸다. “6급이 7급한테 일 시킨다”는 잇단 고발과 “성희롱성 발언과 부당한 업무지시는 범죄이니 신고하라”는 조언이 이어졌다. 도청 내 성희롱 고충 상담자를 일러주거나 “실행에 옮기긴 힘들어도 대처 방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격려도 담겼다.

불과 10년 전이였다면 침묵했을지 모른다. 불합리하고 울화가 치밀어도 ‘회사생활이란 게 원래 그러려니’ 속으로 삭이며 참고 넘어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공공기관과 기업에 입사한 신입들은 불의를 참지 않는다. 마땅한 대응을 망설이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 2000년대 초 출생 세대) 신입들 덕분에 조직문화가 바뀌고 있다. 특히 근래 여러 조직에 신입사원으로 포진한 90년대 생들은 조직의 낡은 관행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재미를 통한 자아실현을 바라고 그렇기에 일터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며 직업 선택 시 일과 삶의 균형은 필수인 사람들. ‘꼰대질’하는 기성세대는 철저히 외면하며 헌신의 대상은 회사가 아니라 ‘나의 미래’이기에 언제든 이직과 퇴사를 생각하는 세대. ‘90년생이 온다’ 저자 임홍택(37)씨는 90년대 생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했다. 직장 풍경이 달라진 이유다. 그는 “90년대생을 비롯한 근래의 신입공무원은 불합리한 지시나 폭력 등을 참기보다 고발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한다”라며 “새로운 세대는 성희롱성 발언이나 언어폭력 등으로 인한 정서적 피해(Emotional injury)를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신체적인 폭력으로 받아들인다”고 분석했다. 이는 공공기관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가 근무하는 곳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부연했다.

20만명이 넘는 공무원시험 응시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직장’에 입사한 기쁨도 잠시, 청년 공무원들은 ‘고생 끝에 낙이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돌린다. 그래픽=김경진기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 조직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차는 뚜렷하다. 조직 특성상 다소 경직된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는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아예 벗어나기를 택한다. 전문 계약직으로 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이다솜(35ㆍ가명)씨는 “입사 첫 달부터 퇴사를 고려했고 6개월 뒤부터는 ‘1년만 채우자’는 마음가짐으로 일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2년 계약으로 고용됐지만 별다른 사정이 없으면 계약을 갱신하며 최장 10년까지 근무할 수 있지만 조만간 퇴사할 계획이다. 그에겐 안정성보다 자기만족이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전문 자격증을 소지한 이씨가 적은 연봉을 감수하고도 공공기관을 택한 데에는 사기업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고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문제제기에도 ‘공무원 조직은 원래 이렇다’는 답변을 반복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조직에서 이씨는 희망을 찾지 못했다. “비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업무지시를 하는 데다 채용 목적과 달리 전문성을 전혀 발휘할 수 없게끔 업무분담을 합니다. 제가 이 조직에서 일하는 것이 스스로는 물론 조직에도 도움이 되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입니다.”

전문가들은 공무원의 장점으로 꼽히는 안정성과 복지 등을 상쇄할 만한 여러 이유가 청년 공무원들을 퇴사로 이끈다고 내다본다. 조기퇴사자들은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이러다간 곧 심리상담을 받겠다’며 사직서를 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지방직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채이슬(31ㆍ가명)씨도 가까운 시일에 퇴사를 계획하고 있다. 그는 교육대 진학을 준비 중이다. 이유는 역시 자기만족, 그리고 행복이다. 민원인 스트레스와 박봉은 처음부터 각오했지만 조직문화까지 견디기엔 벅차다고 말한다. “당장이라도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매일 재미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 걱정이 앞서지만 이곳에서 불행하게 30년을 지내느니 더디더라도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을 찾기로 하고 퇴사를 준비 중입니다.”

그래도 꼭 퇴사까지 해야만 하는 걸까?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쌓으며 대학 시절을 숨가쁘게 보내고 졸업 후엔 수년간 공무원 수험서에 파묻혀 지내며 거머쥔 합격증이다. 사기업이 아니니 재입사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의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오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기성세대는 묻는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박차고 나온다는 선택지를 떠올려 본 적 없는 그들에겐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레니얼 세대는 입을 모은다. “오늘의 확실한 행복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김가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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