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열네 살이었네요. 할머니가 참말로 쓸쓸해 보이던 날에 이렇게 물었으니까요. 열네 살이면 중학교에 들어가는 나이. 어린이에서 살짝 벗어나는 나이. 어른의 세계를 알 것도 같은, 일생에서 몇몇 이행기에 속하는 나이.
열네 살에 물었고, 그로부터 오십년이 지났으니, 이 시의 화자는 예순네 살이 된 것이지요. 할머니, 엄마, 나, 그런 순서에서 이제 맨 앞, 할머니가 된 나지요. 할머니는 별별 시간을 다 겪어 속이 복잡할 것 같지만 단번에 얘기하는 사람. 마음에 소박한 단란의 풍경을 거느린 사람. 구워주던 떡을 마음의 불씨로 품고 사는 사람.
밖은 눈보라. 할머니가 젊은 엄마였을 때. 화로에는 떡이 구워지고 있고, 화로 주위로는 볼이 빨간 아이들이 앉아 있고, 그 안에는 나의 엄마도 있고. 할머니, 할머니, 깡충깡충 부를 수 있는 이 톤이 다시 떠오른 때는 쌀과 약간의 소금과 약간의 물로만 된 떡의 맛을 알게 된 때. 은근하게 짭조름한, 아무 것도 아닌 맛을 알게 된 때.
이바라기 노리코는 개인에서 세상의 일까지를 쉬운 언어로 녹여낸 시인이지요. 윤동주에 대한 관심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현대시선’으로 요미우리문학상(번역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여러 번 읽으며 놀라게 되는 것은,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의 김혜자처럼, 이 시에도, 할머니 안에 열네 살이 산다는 것이지요.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 시를 예순네 살에 썼는데 말이죠.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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