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간 샤넬 패션의 아트 디렉터로 활동한 ‘패션계의 교황’ 칼 라거펠트는 1930년대 이후 위축됐던 샤넬을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명품 브랜드’로 부흥시킨 인물이다. 샤넬을 상징하는 트위드 투피스와 블랙 드레스 등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석해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치마를 짧게 잘라 현대적인 느낌을 주고, 재킷의 올을 풀어헤치거나 데님 등 대중적인 소재와 접목해 젊은 감각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라거펠트는 귀족과 대중, 남성과 여성, 기성과 반기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젊은 샤넬의 정신을 보여줬다. 바이커족 스타일의 퀼트 가죽 재킷과 여성스러운 실크 소재의 드레스를 결합하거나 클래식한 정장인 트위드 재킷을 롱 튜닉 형태의 드레스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샤넬을 대표하는 리틀 블랙 드레스도 그의 손을 거치면서 달라졌다. 샤넬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미를 통해 드레스의 아름다움을 구현했지만 라거펠트는 레이스와 프릴, 플리츠, 망사 등을 활용해 블랙 드레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샤넬의 블랙 드레스가 우아하고 간결했다면 라거펠트의 블랙 드레스는 화려하고 여성스럽고 젊어 보였다.
샤넬이 추구한 간결한 디자인의 근본은 남겨놓은 채, 라거펠트는 세련되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덧입혔다. 그의 디자인은 때로 과해 보일 정도로 화려하지만 샤넬의 우아함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는 간결한 디자인 위에 실험적인 소재와 색상을 사용해 연출함으로써 21세기 패션을 선도했다.
라거펠트의 능력은 의상 디자인뿐 아니라 패션쇼 연출에서도 빛을 발했다. 단순히 런웨이를 걷는 데 그치지 않고, 공항, 쇼핑센터, 식당, 카지노, 크루즈 등으로 런웨이를 확장시켰다. 다양한 장소에서 상상 이상의 연출을 선보이며 ‘샤넬은 패션이 아닌 스타일’임을 보여줬다.
샤넬에 앞서 1960년대부터 진행한 펜디와의 협업에서도 라거펠트의 혁신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펜디는 원래 모피 전문 의상실이었는데, 라거펠트가 수석 디자이너를 맡은 이후로 모피의 다양한 변신을 꾀할 수 있었다. 의상뿐 아니라 가방, 벨트 등의 액세서리를 만들었고, 모피에 주름을 잡고 조각을 내서 이어 붙이거나 염색하는 등 재해석한 모피를 내놨다. 실크와 울 등 다양한 소재와의 혼합도 시도했다. ‘Fun Fur’의 약자로, 펜디의 상징인 ‘더블 F’ 로고 역시 그의 작품이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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