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의 대들보 이승현과 꿈나무 광신중 김경진의 만남
# 선수들은 꿈을 먹고 성장한다. 박찬호와 박세리, 김연아 등을 보고 자란 선수들이 있어 한국 스포츠는 크게 성장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스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 어린 선수들이 자신의 롤모델을 만나 고민을 나누고 희망을 키워갈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농구 꿈나무 김경진(14ㆍ광신중)은 지난 12일 경기 고양체육관에서 자신의 우상인 ‘두목 호랑이’ 이승현(27ㆍ오리온)을 만났다. 잔뜩 설레며 기다리던 김경진은 이승현이 자기 앞에 서자 수줍게 한마디를 꺼냈다. “잘 생기셨어요.”
까마득한 후배의 예상치 못한 ‘립 서비스’에 놀란 이승현은 “너 벌써 사회생활 하는 거니? 아직 그런 거 배우는 거 아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열세 살 차이가 나는 둘의 접점은 오리온이다. 고려대 시절부터 ‘대형 빅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이승현은 2014년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오리온에 입단해 데뷔 첫 해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2015~16시즌엔 팀을 챔피언결정전 정상에 올려놓고 시리즈 최우수선수상(MVP)까지 받는 등 간판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오리온 구단에서 클럽 농구를 시작한 김경진의 꿈도 오리온 유니폼을 입는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걸은 김경진은 지난해 오리온 구단의 연고지 우선 지명을 받았다. 그의 경기를 직접 지켜본 적이 있는 한기윤 농구 아시아리그 팀장은 “굉장히 먼 거리에서도 정확한 3점슛을 꽂는 흥미로운 선수”라며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농구를 받아주는 지도자를 계속 만난다면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스테판 커리(골든스테이트) 유형의 슈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 팀장의 말을 전해 들은 이승현은 “경진아,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프로에 나와라. 그 때쯤이면 우리 팀에 (국가대표 슈터 출신인)허일영 형이 없을 거야. 능력만 된다면 대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오는 것도 괜찮다”고 조언했다. 이에 김경진은 “프로에 가서 스스로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저도 프로에 바로 가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후배의 당돌한 모습에 흐뭇해하던 이승현은 “그런데 네가 오리온에 온다고 할 때 내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너 고등학교 2학년 때 난 자유계약선수(FA)가 되는데…”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화를 거듭하며 이승현을 자연스럽게 ‘형’이라고 부르게 된 김경진은 “형을 믿기 때문에 걱정 안 해요. 5년만 기다려주세요”라고 오리온 잔류를 은근히 압박했다.
이승현은 “그래, 네가 와서 형 우승 한번 시켜줘라. 2015~16시즌에 우승해 림 그물 커팅식을 하던 순간의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다”며 웃었고, 김경진은 “일단 남아주세요. 형이랑 같이 뛰면 슛이 안 들어가더라도 리바운드를 다 잡아줄 것 같아 자신 있게 쏠 수 있을 거예요”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둘의 대화는 리바운드로 이어졌다. 김경진은 중학교 1학년 때 쓰기 시작한 농구 일기에 적극적인 리바운드 가담을 자주 적는다. 큰 키(197㎝)가 아닌데도 리바운드에 능한 이승현은 “넌 가드인데, 왜 리바운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니?”라고 물었고, 김경진은 “공격의 첫 시작이잖아요”라고 답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이승현은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줬다. 가드 중 리바운드를 잘 잡는 선수로 양동근(현대모비스)과 은퇴한 주희정(전 삼성)을 꼽으며 “리바운드는 내가 잡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해. 키가 작더라도 안으로 들어가야 돼. 센터끼리 싸우다가 떨어트리는 공을 잡아도 리바운드로 인정되거든. 이건 몰랐지? 그리고 위치 선정은 딱 하나야. 상대가 슛을 쏘면 던진 위치에서 70~80% 확률로 반대 쪽에 떨어져. 가드가 리바운드를 잡아주면 센터도 편해지니까 팀에도 좋은 일이야”라고 설명했다.
농구 외적인 질문도 이어졌다. 김경진이 “군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해요”라고 묻자 지난달 말 전역한 이승현은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가 “형 표정을 봐. 여기에 모든 게 들어있다”고 짧게 답했다.
또 ‘농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지’라는 질문에 이승현은 “용산고 1학년 때 농구도 잘 안 되고, 감독님한테 많이 혼나서 어머니한테 ‘농구 못하겠다’고 말했어. 그 말을 듣고 바로 아버지가 지방(구미)에서 올라와 날 다잡았어. 부모님이 나만 바라보며 희생한다는 걸 깨닫고 다시 농구만 악착 같이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들 놀 때 같이 놀면 똑같아지니 계속 운동하고, 키 크는데 최악이니 콜라도 마시지 마. 난 지금도 안 먹어. 라면은 나도 좋아하니까 인정. 고기도 많이 먹어. 난 대식가라 혼자 6인분도 먹어. 우린 많이 먹어도 그만큼 운동을 하니까 살 안 쪄서 괜찮아”라고 덧붙였다.
친형 같은 진심 어린 조언에 김경진은 “형처럼 운동을 미친 듯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딱 좋아한 만큼만 했는데, 더 열심히 할게요. 아직 부모님 말 잘 듣고 속 썩인 적은 없어요. 올해 2학년이 되는데, ‘중2병’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형이 기대한 대로 잘 성장해서 꼭 오리온의 에이스가 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다부진 후배의 각오에 이승현은 “오리온은 널 기다리고 있다”며 어깨를 다독였다.
고양=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