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과거와 다른 차원 비핵화 거듭 다짐
북미 협상, 누가 잃고 따는 도박과 달라
작든 크든 상호신뢰 높이는 결실 따내야
지난해 북한 비핵화 논의 분위기를 유난히 불편하게 여기는 이해당사자가 있었다. 이 문제에 시종일관 강경한 일본 정부다.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된 직후 한 강연에서 아베 총리는 “핵무장한 북한을 일본이 용인할 까닭이 없다. 압력을 높여 빠져나갈 길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 방위장관은 “과거에도 북한은 핵프로그램을 폐기하기로 합의해 놓고 무기 개발을 위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며 모처럼의 대화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사석에서 만난 일본 외교관들도 실질적인 핵ㆍ미사일 신고ㆍ해체 약속 없는 회담은 무의미하다며 특히 남북 화해 무드에 부정적이었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 한참 동안 북미 대화에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남북 정상끼리는 평양에서 한 차례 더 만나 비핵화 및 교류를 다짐했지만 시기를 못 박은 약속 중 일부는 지키지도 못했다. 무언가 큰 변화가 있었으면 하고 조바심 내며 이런 현상을 본다면 일본 정부처럼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의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정해졌다. 싱가포르 성명이라는 밑천까지 있으니 기대는 더 부풀어 오르는 게 당연하지만 여전히 회의론도 없지 않다. 북미 협상은 성공의 길로 가고 있는 걸까. 일주일도 남지 않은 하노이 회담에서 단박에 대타협이 나올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1차 때처럼 추상적인 문구로 공동성명을 채운다면 다시 이후 협상에 기댈 수밖에 없다. 과거 실패를 반복할 것이라는 우려가 번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북한 비핵화 협상이 성과를 볼 것이라고 믿을 이유 또한 충분하다. 북한의 핵개발 성공에 대한 자신감, 국제사회의 제재 노력 등은 이 문제를 틀 자체의 변화가 필요한 임계점까지 몰고 간 조건들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라는 전혀 새로운 캐릭터의 이해 주체가 등장한 것도 중요한 변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심증을 굳게 하는 것은 북한이 경제개발 나아가 비핵화를 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공공연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완전한 비핵화”의 의미에 대한 북한 언론의 첫 해설이라는 최근 노동신문 기고가 대표 사례다. 재일동포 명의를 빌렸지만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견해로 봐도 무방할 이 기고는 “조선반도 비핵화”나 “평화에로의 길”이 “주저앉을 수 없고 쉬어갈 수도 없으며 시련과 난관이 막아선다고 돌아서거나 물러설 자리는 더더욱 없는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불과 1년 전 “핵무력은 정의의 보검”이라고 했던 노동신문이다.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비핵화 다짐은 실은 지난달 김정은 신년사에 있었다. 지난 한 해 남북, 북미의 긍정적인 변화를 평가하고 “평화” “협력”에 대한 바람을 가득 담은 이 신년사에서 미국을 향한 경고는 딱 한 번 등장한다.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무엇을 강요하려 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같은 어색한 표현에서 여차하면 판을 뒤집겠다는 결기가 느껴지는가.
이런 상황을 부정적으로 각색해 김정은이 ‘패’를 쥐고 있다며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 북한 비핵화 협상은 누가 따면 누가 잃는 도박판이 아니고 그런 제로섬 게임을 목표로 하고 있지도 않다. 하노이의 결과물이 크든 작든, 단계적이든 포괄적이든 북미가 ‘윈윈’을 지향하는 데다, 북한이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비핵화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아베의 입에서도 “대북 압력”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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