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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좀비가 말하는 한국사회

입력
2019.02.2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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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넷플릭스 제공

지체 높은 양반님이 체통이 뭐냐는 듯 정신 없이 달린다. 3보 이상은 가마를 탈 듯한 왕세자도 별 수 없다. 살기 위해선 죽을 힘을 다해 뛸 수 밖에.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업체(OTT)인 넷플릭스가 지난달 25일 공개한 드라마 ‘킹덤’에선 낯선 장면들이 릴레이로 이어진다.

‘킹덤’의 배경은 조선 후기 어느 때다. 두 번의 전란을 겪고 세도정치가 횡행하던 시절이다. 왕실에서 유래된 ‘역병’이 동래에까지 전파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세도정치를 바로잡으려다 실패해 도주하면서 역병의 정체를 찾아나선 왕세자가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킹덤’은 여러 은유를 담고 있다. 드라마에서 역병으로 표현되는 건 좀비다. 중병에 걸린 왕을 치료하기 위해 몰래 입궐한 한 의원의 몸종이 왕에게 물린다. 전란과 지배층의 수탈로 굶주린 사람들이 몸종의 시신을 먹으면서 역병은 창궐한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사람이 주변 사람을 잡아먹는 극단의 병이 급속도로 번진다. 왕이 좀비가 되는 과정에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세도가의 음모가 작용했다. 지배층의 부도덕한 욕망이 국가 전체를 병들게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좀비는 서인도제도 원시신앙에서 유래했다. 점술에 의해 움직이는 시체가 좀비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저예산 공포영화였지만 반향은 컸다. 1960년대는 대중사회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영화와 방송 등 대중매체의 발달로 이전과는 다른 사람들인 대중이 등장했다. 덩어리진 사람들의 무리였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익명성이다. 사람들은 익명성에 숨어 혼자서는 하지 않을 일들을 행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대중매체에 쉽게 휩쓸리고 익명성에 기대 행동하는 사람들을 좀비로 비유한다. 당대 동서냉전과 원자력에 대한 공포(영화는 핵 누출사고로 좀비가 발생했다고 암시한다), 인종문제도 반영한다. 좀비영화의 시초격인 작품부터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했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좀비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2009년 개봉한 독립영화 ‘이웃집 좀비’는 한국에선 드문 좀비 콘텐츠라는 점에 주목 받았다. 2016년 영화 ‘부산행’의 흥행은 큰 전환점이 됐다. 1,000만 관객을 모으며 좀비 대중화를 이끌었다. 지난해 사극과 좀비를 결합한 영화 ‘창궐’에 이어 ‘킹덤’이 선보였고, 지난 14일에는 좀비를 소재로 한 코미디영화 ‘기묘한 가족’이 개봉했다.

좀비 콘텐츠의 잇따른 등장은 일종의 사회적 징후다. 좀비는 존재 자체로 공포다.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물어뜯는다. 그들에게 영혼은 없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다. 좀비에게 물리면 누구든 좀비가 된다. 제 아무리 가족이고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좀비가 되면 제거 대상으로 돌변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가족을 죽이고 친구를 없애야 한다. 왕이나 왕세자도 좀비라면 죽여야(물론 많은 망설임이 있겠지만) 하는 게 좀비 콘텐츠 속 인물의 숙명이다.

누군가를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은 비정한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사회적 약자가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공격하고, 무분별한 집단주의에 기대어 특정 집단을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행태에서 좀비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과 그들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우리는 좀비를 본다.

좀비 콘텐츠는 공포물보다 재난물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급속도로 좀비로 변하는 과정은 인류 절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폴 부르제는 저서 ‘정오의 악마’(1914)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화면 밖 좀비가 무서워지는 요즘이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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