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업은 업계에서도 ‘단군 이래 내내 불황’이라 불리는 ‘만년 사양산업’이다. 지면보다 화면이 익숙한 시대,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그걸 누가 봐?”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흐름에 태클 거는 이들이 등장했다. 너도나도 ‘디지털 퍼스트’를 부르짖는 오늘날에 말이다. 단순히 ‘시대를 역행하는 이들’로 치부해버리면 섭섭하다. 변화의 바람은 출판계 바깥에서 시작됐다. 슬금슬금 독립서점이 생겨나더니, 이를 토대로 독립출판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작가가 글만 쓰는 게 아니라 책도 만든다. 굳이 많이 만들 필요 없다. 적게 만들어 적게 판다. 수제품처럼 만든 이의 색깔이 오롯이 담긴다. 기성 잡지의 공식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독립 잡지’의 시대가 열렸다.
◇자동차와 명품이 없는 잡지
“기존의 여성 잡지, 혹은 남성 잡지스러운 건 ‘단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독립 잡지만의 매력이죠.” 지난 14일 함께 만난 독립 잡지 ‘볼드저널’ 김치호(43) 발행인과 ‘우먼카인드’ 나희영(40) 편집장의 얘기다. 이들이 만드는 잡지는 특이하다. 볼드저널은 3040 남성독자를 겨냥했다. 그런데 럭셔리카나 스포츠 가십이 없다. 대신 요즘 아빠들의 소소한 고민을 담았다. ‘가족과 함께 멋진 주말을 보내는 법’부터 시작해 ‘21세기 아빠가 젠더감수성을 배워야 하는 이유’까지 소재는 다양하다. ‘우먼카인드’도 여성지의 공식을 깨긴 마찬가지. ‘어제보다 오늘 더 예뻐져라’라고 주문 걸지 않는다. 그보다 ‘주저 말고 꿈을 가져보라’고 하는 여성의 함성이 가득하다.
눈 밝은 독자들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이 났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게 잡지의 운명일진데, 만화책 모으듯 호수별로 사들이는 마니아들까지 생겼다. 2016년 창간한 볼드저널은 어느덧 열 한 권째, 2017년 창간한 우먼카인드는 여섯 권째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우먼카인드는 호당 3,000부씩, 볼드저널은 2,000부씩 찍는다. 많이 만들지는 않지만 찍는 족족 ‘완판’이다. 기성 잡지들도 줄줄이 폐간하는 판국에, 이 두 잡지는 없어서 못 파는 수준이다.
◇볼드저널ㆍ우먼카인드, 젠더를 다루다
인기 비결은 지금 이 시대의 화두에 응답했다는 점이다.
우먼카인드는 페미니즘 열풍을 타고 등장했다. 페미니즘 이슈는 활활 불타오르는데, 책은 느렸고 기존 잡지는 가벼웠다. 깊이도 있으면서 기동성 있게 이슈를 다룰 수 있는, 책과 팸플릿의 중간 영역을 잡지로 만들고 싶었다. 마침 호주의 여성잡지 ‘우먼카인드’(2014년 창간)에서 한국판을 내보란 제안이 들어왔다. 여러 조건의 차이가 있으니 원문 그대로 번역해 싣는 게 아니라 국내 필진들의 기고를 받아 꾸렸다. ‘미투’ ‘경력 단절’과 한국의 이슈들이 담겼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간호만 5,000부 팔렸다.
볼드저널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독하게 싸우고 있던 3040 남성들의 절규에 응답했다. 시작은 김 발행인의 개인적 고민이었다. “모처럼 일찍 귀가했던 어느 저녁, 6살 난 아들이 저를 밀쳐내며 대뜸 내던진 한 마디가 방아쇠가 됐어요. ‘아빠, 저리 가서 자!’ 쿵, 충격이 왔죠. 대체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더라고요.” 회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되물었다. “나는 어떤 아빠이고 싶은가.” 생각해보니 이건 자기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방황하는, 주말을 두려워하는 아빠들을 위한 잡지를 고민했다. 창간호 주제도 ‘내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법’으로 잡았다. 대체 어떻게 놀아줄까, 지금이라도 확인할 방법은 아쉽지만 없다. 창간호는 물론, ‘집’을 다룬 5호, ‘젠더’를 다룬 8호는 품절됐다.
◇아빠들의 고민, 볼드저널
지난해 3월로 예정된 볼드저널 8호 발행을 앞두고 2017년 말 ‘젠더’를 주제로 잡았다. 첫 오프라인 강연회도 준비했다. 기획하면서 독자자문단에 의견을 구했다. ‘아빠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안고 있는 아빠들이었음에도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들의 태도를 바꾼 건 때마침 터져 나온 ‘미투’였다. 각 분야에서 미투가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자문단 소속 아빠들은 “호되게 뒤통수 맞은 표정”을 하고선 다시 찾아와서는 일제히 외쳤다. “젠더, 이거 좀 알아야겠는 데요.”
잡지 발행은 김 발행인의 삶도 바꿨다. “어른이라면 반찬 3개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대요. 아차, 싶었죠. 요만큼 도와주고 이만큼 생색내는 인생이었는데, 그건 가사일이 내 일이라 단 한 번도 생각 안 해서였죠.” 김 발행인의 목표도 그거다. 남더러 뭐랄 것 없이 나와 너, 모두가 변하자. “창간할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단순히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실용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무드(mood)’ 같은 걸 만들고 싶다고요. 독자들과 교감하면서 ‘어쩌면, 가능할 수도?’라는 생각을 했죠.”
◇딸들의 미래, 우먼카인드
볼드저널이 ‘아빠의 상식’에 도전한다면 우먼카인드는 ‘딸들의 미래’에 집중했다. 페미니즘 열풍을 타고 창간됐다고 해서 전투적인 페미니즘 학술지 같은 걸 떠올릴 필요는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저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는 보통 여성들 이야기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저렇게 살아가는 여성도 있구나, 그렇게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일까, 정기구독자를 조사해보면 딸을 둔 엄마들이 특히 많다. “지구 반대편에서 한 여성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읽을 때마다 묘한 ‘연대감’ 같은 게 생겨요. 그게 단 한 사람의 삶에 불과할지라도, 그게 이 세상 모든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나 편집장의 설명이다.
나 편집장 개인적으로는 창간호에 소개된 터키의 60대 여성 위미예 코차크 이야기가 와 닿았다. 여성은 아예 집 밖 출입이 안 되는 분위기에서 자란 코차크인데 마흔 중반에 연극을 접하고 연극연출을 공부, 터키의 국민 감독이 됐다. “그런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것 만으도 스스로 고무되는 기분이 들어요. 여성의 가능성을 대리체험 하는 거죠.” 엄마가 딸을 위해 정기구독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독립’잡지여야 하는 이유
두 잡지엔 광고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먼카인드는 단 한편의 광고도 없다. 광고를 대신하는 건 아름다운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여성 철학가들의 잠언들이다.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독립성 때문이다. “독립성, 관점의 독립성이죠.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겠다’는 선언이랄까요. 비주얼의 통일성을 위해서기도 해요. 책 중간에 광고가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흐름이 끊기니까요.”
이들이 보기에 독립잡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즈니스’ 이전에 ‘가치’다. 김 발행인은 볼드저널창간 전에 다른 잡지의 편집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때 알았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책을 산다는 건 단순히 ‘정보의 구입’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라는 점을. “표지 디자인이 직관적으로 주는 느낌, 책의 질감, 군데군데 들어간 일러스트부터 텍스트의 배열까지, 그냥 ‘잡지’가 아니라 하나의 ‘종합 상품’이어야 해요. 테이블 위에 툭 던져놔도 책 그 자체가 포인트가 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래서 이들은 인쇄 매체들의 화두인 디지털 퍼스트도 무시한다. 두 잡지 모두 온라인 사이트는 있지만, 거기다가는 콘텐츠의 일부만 제공한다. 편집이 부여한 물성 없이는 우리 잡지를 온전히 느꼈다 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른 결과다.
◇잡지가 곧 정체성, 스테디로 간다
“외국에선 잡지를 ‘럭셔리 프로덕트(Luxury product)’로 분류해요. 꼬박꼬박 다 읽지는 않아도 그걸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표현’이 되는 거예요.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장치가 되는 거죠.” 김 발행인이 볼드저널을 처음 구상할 때 머릿속에 그려냈던 그림도 바로 그거였다. 볼드저널을 들고 다니거나, 꺼내서 읽는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이 그를 ‘멋진 요즘 아빠’라 인식하는 풍경 말이다. 물론, 독자 10명 중 4명이 여성이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지만. 대신 얻은 것도 있다. “여성 독자분들이 ‘볼드저널 보는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씀을 해주세요. 그러면 목표의 반은 이룬 거 아닐까요.”
나 편집장도 이런 관점에 흔쾌히 동의했다. “어떤 잡지를 사본다는 것, 그 자체가 ‘나는 이 잡지가 표방하는 철학의 신봉자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먼카인드는 이미 ‘여성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됐다고 봐요.” 독자 성비를 물으니 10명 중 1명 정도가 남성이란다. 남성 독자 비중이 아쉬울 법도 한데, 나 편집장은 긍정적이었다. “에이, 1%가 아니라 벌써 10%나 됐다는 게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에요.” 희망에는 근거도 있다. 지난해 6월 2018 서울국제도서전에 마련한 부스엔 남성 독자들이 계속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미래의 독자들이다.
단단한 소신이 있는 이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이들의 소신은 읽을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라 해도 개성과 질을 꾸준히 유지하는 잡지는 결코 독자가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문제는 개성과 질이다. 그건 이 시대의 화두와 연결된 문제다. 다음 호에는 어떤 주제를 던질까, 기다려지는 이유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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