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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어른은 진보다!

입력
2019.02.19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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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동창들과 저녁 모임이 있었다. 환갑의 나이니 현직에서 내려오는 친구들이 많다. 건강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어졌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들도 서로 달랐다. 다르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이 드니까 보수적으로 된다”는 말이 내 귀에는 거슬렸다. 흔히 그렇게들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말을 뒤집어서 나이 들면 오히려 진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양진호나 조현아 자매 같은 사람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복종하는 마음일까? 아닐 것이다. 기본적 소양만 갖춘 사람이라면 그 무례하고 비인격적이며 비이성적인 행태에 대해 넌더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맞서 싸울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박창진 전 사무장처럼 용기를 내서 싸워도 함께 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기까지 하는 인간들이 허다하더라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래도 속으로는 그 자매의 한심한 태도에 대해 역겨워할 것이다.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음을 알더라도 행동하지 못하는 건 부양해야 할 가족이 먼저 떠오르고 요즘처럼 일자리 옮기는 건 자칫 자살행위와 같다고 여기는 한 적당히 비겁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맞서 싸우지 않는데 그걸 물고 늘어지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니 가해자들은 잠깐 원망과 분노를 사더라도 적당히 버티면 잊힐 것이라 여기고 잠깐 엎드리는 척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비판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 건 바로 어른들의 몫이다. 특히 은퇴한 실버들이 용기를 내서 발언해야 한다. 해고에 대한 두려움 없는 세대고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본적 의무를 완수한 세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며 때론 모멸을 감수하며 버틴 것은 오로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 인간이 덜 된 자들에게 더 큰 수모와 위협을 당하고 있다면 어찌 그것을 모른 척할 수 있는가.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비겁하게 침묵했지만 이제 그 비겁의 몫은 벗을 수 있다.

현실은 어떤가. 보수를 지향하는(속살은 수구적인 경우도 허다한) 정당은 노인 세대는 당연히 자신들의 편이라고 여겨서 딱히 그들을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할 생각 없고, 진보를 칭하는(그러나 실체는 보수의 가치조차 못 미치는 경우도 허다한) 정당은 어차피 그 세대의 표는 자신들에게 올 게 아니라 여기니 다가가지도 않고 정책을 개발하지도 않는다. 나이 들면 보수라고 여기는 이 한심한 고정관념이 빚어낸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 아무도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 결과를 자초하는 게 또한 나이 든 세대의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지금의 6,70대 시니어 그룹은 최초로 보편적으로 고등학교까지 교육 받은 첫 세대다. 그 점이 이전의 노인 세대와 다른 점이다. 분명히 학교에서 배웠다. 개인과 사회의 의무뿐 아니라 권리에 대해 배웠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정의, 연대 등의 가치를 배웠다. 물론 실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관념적으로만 배운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 가치에 대해서 배우기는 했다. 다만 바삐 사느라고, 그리고 부양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 때문에 말도 되지 않는 부조리와 비합리 그리고 심지어 비인격성까지 참고 견디며 버텼다. 이제 그 의무에서 벗어났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애당초 배우지 못했다면 모를까 알고 있다면 당연히 말해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웠던 가치인 자유, 평등, 민주주의, 정의, 연대 등이 억압되고 왜곡되며 심지어 불의한 세력에 의한 프레임전략에 훼손되어도 그건 비판하고 맞서 싸우지 못하면서 지금의 번영이 모두 자신들의 피땀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하며(정말 그럴까?) 요즘 아이들은 도대체 그걸 모른다며 타박하는 따위의 일에나 핏대를 세우니 ‘꼰대’니 ‘틀딱’이라는 말이나 듣는다. 이제 부양의 의무 때문에 눈치 봐야 할 것도 없고(물론 경제적 박탈감에 주는 위축감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봐서 깨달은 경험과 지혜를 토대로 다음 세대를 위해 발언하고 격려하는 역할이 나이 든 세대의 몫이다. 좀 더 지혜롭고, 용감하며(진리와 정의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가치에 대해), 너그러운 멋진 실버가 되어야 한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생물학적 노쇠라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위축된다는 점에서 서러울 수 있지만 생각과 정신은 더 또렷하게, 그리고 늦게라도 올바른 가치에 대해 충실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고,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시기이다. 더 이상 ‘나이 들면 보수’라는 어리석은 고정관념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아야 한다. 어른이 젊은이들에게 디딤돌이 되지는 못할망정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모범을 세워야 한다. 나이 들면 오히려 진보여야 한다고 당당히 외치고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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