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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입력
2019.02.18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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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응급의학과 내부에서 개최되는 워크숍이 있었다. 많은 안건 중에는 지난 1년간 응급의학과로 들어온 민원 사항이 있었다. 이 민원 파일은 폰트가 얼마일지 가늠이 안 가는 세밀한 글자의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세부 내역은 서비스를 업으로 하는 대부분의 업종이 그렇듯이, 어떤 것은 개선 사항을 떠올려보게 하고, 또 어떤 것은 조금 억울하거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왜 이러나 혀를 차게 하는 것이었다. 그중 생각해볼 만한 민원을 하나 소개한다.

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이 학생은 학교에서 다른 아이에게 폭행을 당했다. 얼굴에 생채기가 났고 맞은 곳이 약간 부었다.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가 학교로 호출됐다. 그리고 그들은 일단 아이와 함께 진단 및 치료를 위해 응급실로 왔다.

응급실 의사의 입장에서, 모든 폭력은 매우 나쁜 것이며 학교 폭력이야말로 근절돼야 할 것이지만, 굳이 중증도로 분류하자면 대부분의 학교 폭력은 경환에 속한다. 보통 아이들은 음주 상태가 아니며 성인만큼 상대방을 잔인하게 때리지 않는다. 상처를 소독하거나 봉합하고, 가끔 발견되는 골절을 방사선 검사로 확인해서 추후 치료받을 수 있게 하면 된다. 아이의 부상은 한눈에도 크지 않았다. 즉시 상처를 소독 받고 CT 촬영을 마쳤다. 아이의 보호자들은 여러 가지 심경으로 그 결과를 기다렸다.

역시 CT 상에도 별 소견은 없었다. 아이는 단순 타박상으로 회복될 때까지 상처를 소독 받는 정도의 치료만 받으면 되었다. 결과를 받아놓고 담당의는 다른 중환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걱정이 된 가해자의 부모가 담당의에게 물었다. “CT 결과는 어떻습니까.” “아, 일단 결과는 괜찮고, 골절도 없습니다. 기다리면 차차 설명해 드릴 겁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민원은 이 장면에서 발생했다. 피해자의 부모는 담당의가 ‘환자의 비밀 보장’을 어겼다고 우리 과에 민원을 넣었다. 환자의 상태는 엄연히 환자나 보호자에게만 알려야 하는 것인데, 아닌 사람에게 환자의 의료 기록을 알렸으니, 비밀 보장을 눈앞에서 어긴 셈이라는 내용이었다.

일단 이 민원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피해자의 부모와 가해자의 부모는 처음부터 서로 알고 있었을리 없고, 감정의 골도 좋을 리가 없다. 각자는 복잡하고도 특수한 관계가 되어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료진이 덜컥 가해자의 부모에게 입을 열자 불편했을 것이다. 틀린 논리가 아니다. 분명 의료진이 앞으로도 조심해야 하는 지점이다.

허나 의료진의 입장에서는, 환자와 같이 온 보호자들의 관계를 짧은 시간에 전부 파악하기는 어렵다. 모두가 아이를 걱정하는 어른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이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만약 아이가 뇌출혈이 생겨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다면, 의료진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 중한 사항은 당연히 환자와 보호자만이 알아야 한다. 하지만 ‘상태가 괜찮고, 수술도 필요치 않으며, 가만히 있으면 잘 나을 것이라는’ 희소식을 극렬한 비밀로 생각하기는 조금 어렵다. 그리고 그 부모는 직접 폭행을 행한 사람도 아니고, 어쨌거나 걱정돼서 같이 온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괜찮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할까. 그래서 “괜찮다”는 반드시 피해자 부모가 한번 듣고 그 자리의 가해자 부모로 전달해야 순리에 맞는 것인가. ‘괜찮다’는 사실은 논란 없는 희소식인데 말이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신중하자면 무조건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고 친보호자가 아니라면 입을 닫는 게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걱정해서 묻는 사람에게, 아주 경과가 양호할 경우, 지나가는 말로 “일단 괜찮습니다.”까지 완벽히 숨길 자신은 없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일까.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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