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한직업’이 한바탕 웃음 잔치를 벌인 극장가에 섬뜩하고 음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다. 극강의 서스펜스로 모세혈관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공포 스릴러 영화들이 잇달아 출사표를 던진다. 한국에선 ‘사바하’가, 할리우드에선 ‘해피 데스데이 2 유’가 대표주자다. 두 영화는 각각 ‘종교적 광기’와 ‘정체 모를 살기’를 내세워 관객의 심장을 조여 온다. 공포물에 호감도 높은 10~20대 관객이 타깃이다.
2월 봄 방학에서 3월 새 학기로 이어지는 시기는 극장가 비수기로 통하지만 공포물에는 큰 시장이다. 수능시험과 기말고사 사이 11월도 마찬가지다. 10~20대의 학업 생활 패턴에 맞춰 공포 영화 시장이 형성되고, 맞춤 개봉 전략이 자리 잡아가는 분위기다. 지난해 11월에는 ‘할로윈’과 ‘여곡성’ 등이 관객을 만났다.
‘곤지암’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지난해 3월 말 개봉해 무려 267만5,649명을 동원했다. 새 학기에 친구를 사귀는 과정에서 대화 소재로 오르내리면서 입소문을 탄 것이 흥행 이유로 꼽혔다. 10대는 학교와 학원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입소문 전파가 빠르고 2~3인 이상 단체 관람도 많다. ‘해피 데스데이 2 유’를 홍보하는 영화홍보사 하늘 관계자는 “공포물이 블록버스터처럼 볼거리가 많은 건 아니지만 정서적 교감을 나누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장르라서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10~20대가 더 호응하는 것 같다”며 “예고편 대사를 10대 은어로 연출하는 등 맞춤형 마케팅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2017년 개봉했던 ‘해피 데스데이’ 속편인 ‘해피 데스데이 2 유’는 14일 하루 동안 7만2,440명을 동원하며 서서히 흥행 시동을 걸고 있다. 전작도 수능시험 시즌에 개봉해 138만2,650명을 불러모으며 알짜 흥행을 거뒀다. ‘파라노말 액티비티’(2009) 시리즈와 ‘겟 아웃’(2017) 등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공포영화 제작사 블룸하우스가 만들었으니 믿고 볼 만하다.
전작에서 대학생 트리(제시카 로테)는 생일날 학교 기숙사에서 아기 가면을 쓴 살인마 ‘베이비’의 칼부림에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다시 생일날 아침. 똑같은 일상이 다시 반복되고 하루의 끝은 또 죽음이다. 트리는 그렇게 11번을 죽고서야 살인마의 정체와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된다.
속편에서 트리는 또 다시 타임루프(동일한 시간이 반복되는 것)에 갇힌다. 공학도 친구의 양자역학 실험이 트리를 현실과 병행해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기 때문이다. 타임루프에 평행우주 이론이 결합하면서 미스터리가 더 복잡해졌다. 다시 지긋지긋한 생일날 아침으로 돌아간 트리는 베이비에게 죽임 당할 바에야 스스로 죽겠다며 쓰레기 분쇄기에 뛰어들거나 비키니 차림으로 스카이 다이빙을 한다. 기상천외한 자살 방법들이 섬뜩하면서도 발랄하다. 미묘하게 달라진 상황에서 트리는 살인마 베이비와의 최후 대결을 준비한다.
귀여운 얼굴로 갑자기 툭 튀어나와 관객을 놀라게 하던 베이비의 존재감은 덜하다. 하지만 스스로 운명에 맞서는 트리의 활약은 더욱 강렬해졌다. 타임루프로 빚어진 코믹한 상황극에 한참 웃다 보면 문득 목덜미가 서늘해져 온다. “우리는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도 제법 묵직하다.
20일 개봉하는 ‘사바하’는 제목부터 신비주의적 색채를 풍긴다. ‘검은 사제들’(2015)로 한국형 오컬트 장르를 개척한 장재현 감독이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전작에선 소녀의 영혼을 잠식한 악령과 싸우는 가톨릭 구마 사제들의 이야기를 그렸고, 이번 영화에선 불교 세계관을 토대로 신흥 종교 집단을 둘러싼 기이한 사건을 다룬다.
염소들이 미친 듯이 울어대던 어느 날 쌍둥이 자매 금화(이재인)와 짐승 같은 형상을 한 ‘그것’이 태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매의 주변에선 불길한 일들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 눈을 피해 시골 마을에 은둔한 자매는 어느덧 열여섯 살이 된다. 그 즈음 사이비 종교 연구자인 박 목사(이정재)는 불교와 밀교에 뿌리를 둔 사슴동산이라는 종교 집단을 발견한다. 사슴동산의 정체를 쫓다 의문의 살인 사건과 마주친 박 목사는 배후에 있는 낯선 청년 나한(박정민)의 존재를 알게 되고, 사슴동산에서 경전을 빼내 진실을 추적한다. 그리고 나한의 수상한 발걸음은 금화와 그것에게로 향한다.
박 목사와 나한, 쌍둥이 자매로 나뉘어 뻗어가던 세 갈래 이야기는 중반부 이후 서로 교차하면서 충격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죽음도 불사하는 광적인 믿음보다 신의 자리를 탐하는 인간의 욕망이 더욱 큰 공포로 다가온다. 꼼꼼한 취재가 토대가 된 영화적 세계관이 탄탄하다. 초현실적 존재를 눈앞에 드러내 보여주지 않고도 무채색 화면과 카메라 각도, 괴기스러운 배경음으로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연출도 탁월하다. “신은 어디에 계시냐”는 박 목사의 공허한 읊조림에 한국 사회의 처연한 아우성이 스친다. 장 감독은 “절대자가 선하다고 믿지만 세상을 보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며 “박 목사에 나를 투영했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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