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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도 국채보상운동 앞장섰다 일본경찰과 싸운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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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도 국채보상운동 앞장섰다 일본경찰과 싸운 기록이 있습니다”

입력
2019.02.14 17:30
수정
2019.02.14 17:54
0 0

[이슈 & 인물] <3> 김영철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국채보상운동은 시민의 책무인 ‘시티즌 오블리주’의 발로”

대구와 개성 ‘달송동맹’에도 국채보상운동이 역할해야

기생 ‘앵무’로 알려진 염농산 선생은 당시 집 한 채 값인 100원을 기부

국채보상운동 세계화를 위해 21세기형 라키비움 건설해야

김영철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가 12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1997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의 영상을 배경으로 국채보상운동 연혁을 설명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김영철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가 12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1997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의 영상을 배경으로 국채보상운동 연혁을 설명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인증서가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안에 전시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인증서가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안에 전시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1층 로비에는 신영복 선생이 직접 쓴 '한국기부문화일번지' 글귀가 걸려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1층 로비에는 신영복 선생이 직접 쓴 '한국기부문화일번지' 글귀가 걸려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1907년 2월21일 대구 서문시장 인근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렸다.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는 같은 날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됐고,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모금운동이 전개됐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패물을 내놨다. 당시 한 해 나라 살림에 맞먹는 1,300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상공인과 지식인, 서민, 학생은 물론 백정과 도둑, 기생들도 일어났다. 나라의 주인이 시민, 곧 국민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중국과 베트남, 멕시코 등 외국에도 영향을 줬고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금모으기운동으로 되살아났다.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세계인의 시민정신으로 전파하고 있는 중심에는 여전히 대구가 있었다. 12일 김영철(61)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만난 대구보상운동기념관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고 신영복 선생의 친필 현판 ‘한국기부문화일번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담=전준호 대구한국일보 편집국장

_국채보상운동 세계화를 위해 북한자료 수집에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신문에 게재된 ‘평양 국채보상회 취지서’와 ‘해주 국채보상단연동맹회 취지서’ 등을 보면 북한에서도 운동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한에는 개인적인 기부 영수증과 서간문, 통문 등 수기자료가 많이 남아있을 것으로 본다. 운동의 확산 전개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연구할 분야다.”

_개성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대구와 공통분모가 많은가.

“개성은 국채보상운동 참여자가 2,068명으로 북한 도시 중 세번째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대구시가 같은 내륙도시인 개성과 자매결연을 추진하면 개성 지역 국채보상운동 수기자료를 중점적으로 파악할 계획이다. 대구와 개성이 옛 지명 달구벌과 송악의 앞글자를 딴 ‘달송동맹’을 맺으면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 양 도시는 경제 분야에서도 윈윈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_안중근 의사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나.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의 옥중수기에 기록이 있다. 1907년 평양에서 열린 국채보상회 발기인 대회에서 일본 경찰과 몸싸움을 벌인 내용이다. 당시 일본 경찰은 회원과 모금액을 물었고 안 의사는 ‘회원은 2,000만명이고 곧 1,300만원을 모아 국채를 갚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등인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일본 경찰의 비아냥이 몸싸움으로 이어진 것이다. 안 의사가 세운 삼흥학교 교원과 학생,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와 아내 등 온 가족이 동참했다.”

_국채보상운동 기록보관소를 도서관과 기록관, 박물관 기능을 가진 ‘라키비움’ 형식으로 지을 계획이라고.

“민간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을 보면 감동적 스토리가 1,000건이 넘기 때문에 뮤지컬과 음악, 문학, 춤,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온라인으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전시관도 만들 것이다. 세계적인 추세도 도서관에다 다양한 기능을 추가해 라키비움을 구축하고 있다. 문화관광도시 대구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될 것이다.”

_대구중앙도서관을 국채보상운동 라키비움으로 리모델링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주민들은 반대하고 있다. 도심에 유일한 도서관이 사라지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도심에 도서관이 사라지고, 상권이 약해진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라키비움이 들어서더라도 도서관 열람실과 도서대출, 독서 공간 등 도서관 기능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할 계획이다. 리모델링을 통해 노후화된 도서관을 새롭게 교체하고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추가로 만들면 오히려 상권이 커진다. 21세기형 도서관을 만드는 작업이다.”

_2017년 10월31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채보상운동이 전 세계 외환위기 대처방법의 모델이자 근현대 외채상환운동의 효시라는 사실을 검증받은 것이다. 피지배계층인 민중이 자발적으로 운동을 주도했고, 여성의 적극적 참여가 있었으며, 일본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3년 이상 지속된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록물 2,475건 모두 세계사적 가치를 갖고 있지만 서상돈 김광제 선생이 대구군민대회에서 최초로 주창한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서’를 가장 빛나는 기록물로 꼽고 싶다.”

_외환위기 때 4개월간 351만명이 금 226톤을 모았다. 국채보상운동과 금모으기운동의 같은점과 차이점은.

“외환위기 때 국민들이 느꼈던 위기감은 1907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망국의 위기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라의 빚을 갚고 국권을 되찾으려 한 경제주권 수호운동이다. 1907년에는 일본이라는 대상이 명확했지만 외환위기 때는 외세 만의 책임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또 국채보상운동은 언론사와 애국계몽단체 회원이 주체가 됐으나 금모으기운동은 시작 후 정부가 나섰다. 국채보상운동은 아무런 대가없이 재산을 기부했으나 금모으기운동은 금을 파는 형태로 이뤄진 것이 차이다.”

_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보이는데 참가자는 민초들이 많다.

“기념사업회는 이 운동을 ‘시티즌 오블리주’로 정의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자유와 권리확대로 시민운동이 진행됐으나 국채보상운동은 시민의 의무, 도리, 책임을 위한 운동으로 전개됐다. 나라의 주인으로서 외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_시민의 책무를 강조하면 지배계층의 무능이 희석되지 않나.

“지배계층의 무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제국주의가 휩쓴 역사적 배경도 있다. 시민의 자각이 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티즌 오블리주는 오히려 지금 더 필요한 덕목이고, 세계가 공유해야 할 가치다.”

_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비롯한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국채보상기성회가 태동한 직후인 2월23일 대구 남일동의 부인 7명이 조직했다. 당시 이들이 전국 부녀자에게 보낸 격문을 보면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냐, 나라사랑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남성들은 담배를 끊어 현금으로 기부를 했으나 여성들은 현금과 패물을 내놓으면서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기생 ‘앵무’로 알려진 염농산 선생은 당시 집 한 채 값인 100원을 선뜻 내놨다. 운동을 시작한 대구의 거부 서상돈 선생과 같은 금액이었다.”

_올해 기념사업회는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나.

“국채보상운동 라키비움을 좀 더 구체화하고 북한과 국채보상운동 유적지와 기록물 발굴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국제학술세미나와 기록물 외국어 번역, 디지털 작업을 통해 국채보상운동 세계화사업을 확대하겠다.”

_경제사를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국채보상운동과 인연을 맺었나.

“1994년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후 95년 계명대로 왔다. 귀국 직후 외환위기가 닥쳤는데 이를 ‘1997년 체제’라고 이름붙였다. 경제학자로서 외채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히 국채보상운동의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정리=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김영철 국채보상운동 공동대표가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김영철 국채보상운동 공동대표가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지욱(왼쪽부터) 전문위원과 김영철 공동대표, 전준호 대구한국일보 편집국장이 12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지욱(왼쪽부터) 전문위원과 김영철 공동대표, 전준호 대구한국일보 편집국장이 12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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