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야/네가/아무리 추워봐라/내가/옷 사입나/술 사먹지.”(신천희 시, ‘술타령’) 이분의 경지에는 족탈불급이지만 나도 제법 즐기는 축이다. 주종은 단연코 소주다. 하기야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격변기를 헤쳐온 나 같은 5060세대가 어찌 퇴근길에 쐬주 한 잔 “카악” 하는 소소한 위안을 모른 척 살아왔겠는가.
안도현님은 딱 두 줄짜리 시 ‘퇴근길’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다면/아, 이것마저 없다면”이라고 읊으셨고, 정호승님은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고 시 ‘술 한 잔’에서 서러워하셨다.
소주는 그런 술이다. 맥주가 목구멍으로, 와인이 혀로, 코냑이나 위스키가 코로 마시는 술이라면, 소주는 가슴으로 넘기는 우리네 술이다. 사는 게 고단하고, 흔들리고, 무언가 씻어내고 토해내고 싶을 때 가슴으로 적시는 술이다. 격의 없는 친구와 대작도 좋지만 혼술에도 어울린다. 유유독작견수원(惟有獨酌遣愁怨, 오직 홀로 마시며 시름과 원망을 떨친다)이라 했다.
누구는 ‘서민의 연료’라고 기막힌 비유를 했다. 실제로 성인에게는 쌀밥 다음의 두 번째 에너지원(칼로리)이라고 국민건강 영양조사에 나와 있다. 정부의 소비자물가 조사 대상 생필품 52개 목록에도 짜장면과 함께 올라 있다. 소줏값은 서민 가계에 직결된다는 뜻이다. 통계청의 최근 조사를 보면 20세 이상 남녀는 연간 87병을 마셨다. 하루 평균 두 잔꼴이다.
서론이 길었다. 소주를 찬양하려는 건 아니다.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다. 며칠 전 귀갓길에 동네 어느 이름난 순댓국집에 꽂혀 저녁을 먹었다. 혼자지만 술도 고팠다. 한 병을 시켰다. 밥 먹는 동안 딱 세 잔을 마셨다. 절반 이상 남았다. 아까웠다. 잠시 고민했다.
“근처에 살아서 앞으로 자주 올 건데 소주병을 키핑해 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주인은 멀쩡한 사람이 별 이상한 말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보란 듯이 병마개를 찾아 있는 힘껏 술병을 돌려막고 가방에 넣고 왔다.
요즘 술집에서 받는 소줏값은 보통 4000원이고 5000원까지 받는 집도 많다. 소주 출고가가 인상되면서 3000원 받는 집은 찾기 어려워졌다. 병맥줏값과 같아졌으니 서민의 술이라고 부르기엔 좀 무색하다. 가치담배도 팔던 시절, 포장마차에서는 잔소주라는 걸 팔았는데.
소주의 유통기한은 법적으로 없다. 소주나 위스키 같은 증류주는 도수도 높고 변질될 원료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약주나 막걸리 맥주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소주는 마개만 잘 닫아놓으면 알코올이 오랫동안 날아가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소주는 양주처럼 손님이나 주인장이나 키핑할 생각들을 안 하는 걸까. 반주로 한 병 다 마시기는 부담스럽고, 남기자니 아깝고, 내일 또 올지도 모르는데 키핑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술로 인한 사고도 줄어들 텐데. 오래 전 서대문 어느 골목에서 ‘소주 한 달간 키핑해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써붙인 선술집을 본 적이 있다. 작지만 신선한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마케팅이 별건가. 손님 입장에선 사소한 걸로 대접받고 배려받은 느낌이 들 거고, 주인은 안줏값을 한 번 더 벌 텐데. 키핑은 다시 오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생각의 작은 차이가 의외로 정서적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일본의 이자카야는 소주 키핑(보토루 키프)을 해주는 곳이 많다.
술집 선반에, 각양각색 이름표를 병목에 내건 녹색 소주병들의 열병식. 얼마나 푸근하고 정겨운 풍경일까. 단골 술집에 가면 이제 호기 있게 말하겠다. “아줌마, 소주 남은 거 키핑해주세요. 내일 또 올게요.” 거절당하면? “저, 이제 단골 안 할랍니다.”
한기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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