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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캐슬 너머

입력
2019.02.13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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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국사회를 들었다 놨다 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끝난 지도 꽤 됐지만 ‘스카이 캐슬’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화제를 몰고 다닌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입시에 대해 한두 마디 안 거들 사람이 있으랴. ‘스카이캐슬’은 이른바 ‘입시 코디’를 내세워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을 극사실주의로 묘사해 온 국민의 관심사에 불을 댕겼다.

드라마가 방송되는 내내 현재 시행 중인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있는 집 자식들에게만 절대적으로 유리한 금수저 전형이다, 학교생활기록부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 내신 시험지 유출 같은 비리가 언제나 생길 수 있다, 등등 날카로운 지적들도 많았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학종을 완전히 없애면 결국 시험 한 번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옛날 방식으로 돌아갈 뿐이라 지금까지 입시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는 셈이다.

내 어설픈 생각으로는 그래도 우리가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둘러가는 길을 잡더라도 후손에게 어떤 제도를 물려줘야 할지 항상 되새기면서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더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입시제도가 있다 한들 학벌이 곧 신분으로 직결되는 학벌주의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입시지옥의 불구덩이는 어떻게든 여전히 활활 타오를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누구나 수긍하는 공평무사한 입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다지 많이 고민해 보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는 무조건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 나오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남들보다 더 큰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암묵적인 공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

우리 고등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큰 물음에 나도 아직 답은 없다. 다만 지금 현재 대학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대략 말할 수 있다. 산업계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인력양성이다. 이 목표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점도 말할 수 있다. 당장 입자물리학을 전공한 나 같은 사람은 산업계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런 쓸모를 위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게 아니다. 세상에는 나처럼 쓸모없는 사람들이 꽤 많다. 현실의 대학과 정부당국은 4차 산업혁명에 써먹을 역군에만 관심이 많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정작 대학의 존립 자체가 바닥에서부터 허물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 4차 산업혁명의 근본철학은 기존의 학문구획을 뛰어넘는 초학제 융합이다. 지금까지의 대학구조로는 이를 담아내기 어렵다. 한국사회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또 다른 축에서 대학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언제까지 ‘서연고서성한...’의 구닥다리만 움켜쥐고 있을 참인가.

따지고 보면 그래도 스카이캐슬의 사람들은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 적어도 집안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엄청난 ‘노오오력’을 기울였다. 우리 사회가 정해 놓은 최소한의 규칙은 지킨 셈이다. 현실 사회에는 그 너머의 세상이 있다. 우리가 정한 규칙이 전혀 통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 1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팰리스’가 있다. 팰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곧 법이다. 희대의 최순실 사건은 딸의 부정입학 의혹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었다. 아예 돈이 많은 재벌의 후손들은 굳이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된다. 그저 막대한 부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주가조작이나 탈세 등 온갖 불법행위를 태연히 저질러도 별 탈이 없다. 이른바 ‘3.5법칙(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놀라운 특별법이 팰리스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캐슬 주민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 놀라운 법을 만든 분들은 최근 전대미문의 대규모 재판거래를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유무죄를 따지는 최소한의 법리해석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팰리스의 집사 노릇으로 더할 나위가 없는 분들이다. 이들 편에서 충실한 방패막이가 돼 주는 몇몇 언론은 팰리스의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이다. 재판거래에 뒤질세라 이분들은 자기만의 주특기를 살려 기사거래를 자행한 정황이 최근 드러났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어머니의 정보력과 아버지의 인맥을 총동원해 엄청난 ‘노오오력’을 들여 겨우 명문대에 들어가 스카이캐슬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피라미드 꼭대기가 아니라 팰리스 발아래에 있다. 재판거래를 잘하거나 기사거래를 잘하면 팰리스의 집사나 문지기로 올라갈지도 모른다.

스카이캐슬의 주민들조차 수십억 대의 코디까지 채용하며 저렇게 애쓰는 모습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아직 우리 사회에서 계층이동의 통로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구나 싶은 묘한 안도감이 밀려들다가도, 캐슬 주민들의 막강한 물량과 그 너머의 팰리스를 생각하면 갈수록 그 통로의 입구가 서서히 닫히고 있는 것만 같아 숨이 막힌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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