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전 대법원장, 재판 개입ㆍ인사권 남용 무소불위… 공소장 분량만 296쪽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ㆍ박병대 전 대법관. 연합뉴스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의 몸통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 기소로 지난 해 6월부터 시작된 검찰 수사가 일단락됐다. 수사 과정에서도 일부 드러나긴 했지만 검찰이 11일 발표한 중간수사 결과에서는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유린 실상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권과 결탁해 재판에 개입한 것은 물론이고,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고 법원 내부의 비판세력을 제거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 검사)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과 함께 박병대ㆍ고영한 전 대법관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공소장에 기재된 양 전 대법원장의 범죄사실은 총 47개에 달한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 및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화 사건,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상고심, 통합진보당 의원직 상실 관련 행정소송 등 재판에 개입한 혐의는 물론, 사법부 방침을 비판하는 판사들을 사찰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준 혐의 등이 망라돼 있다. 공소장 분량만 별지 포함 296쪽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공소장(259쪽)의 두께를 압도했다.

양승태 사법부는 특히 상고법원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법원행정처를 동원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임한 2013~2017년 동안 사법행정에 비판적이거나 부담을 줬다는 평가를 받은 이른바 ‘물의 야기 법관’은 모두 31명. 양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를 통해 이들에 대해 문책성 인사조치를 검토하거나 소속 법원장에게 부정적 인사정보를 통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법관의 경우에는 여러 해에 걸쳐 ‘물의야기 법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총 8명의 법관은 실제 문책성 인사로 이어졌다.

대법원장에게 사법정책을 건의하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법관들에게는 여지 없이 인사 불이익이 돌아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강행 처리 이후 국민적 반대여론이 확산하던 2011년 12월 건의문을 올렸던 김하늘 전 부장판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대법원 산하에 한미 FTA 연구를 위한 테스크포스팀(TFT)을 구성해야 한다”는 단순한 건의문이었지만 행정처 측은 “양 전 대법원장은 관련 검토를 지시했다”고 일축한 뒤 인사 불이익을 줬다. 한미 FTA를 비판하는 글을 SNS에 게시한 최은배 부장판사도 같은 방식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 송승용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임명 제청한 박상옥 당시 대법관 후보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인사 불이익을 받았고, ‘미스 함무라비’의 작가로 잘 알려진 문유석 부장판사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글을 언론사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았다.

[저작권 한국일보]사법농단 수뇌부 주요 혐의 별 공범 관계. 강준구 기자

사법부 수뇌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도 인사 불이익의 이유가 됐다. 마은혁 부장판사는 2009년 민주노동당 당직자 12명이 국회 로텐더홀을 점거 퇴거요구에 불응한 혐의로 약식기소된 사건에서 “함께 농성하던 민주당 의원은 입건하지 않으면서, 이들만 기소한 것은 공소권 남용”이라며 공소를 기각했다. 행정처는 5년 넘게 지난 판결을 문제 삼아 2015년 2월 인사에서 마 부장판사를 문책했다. 이번 정부 들어 헌법재판관에 임명된 김기영 당시 부장판사도 인사 불이익 대상에 올랐다. 그는 2015년 9월 대법원 판례와 달리 긴급조치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했다는 이유로 징계가 검토됐다.

이밖에 양승태 사법부는 수뇌부의 사법행정에 대해 비판적인 성향을 견지한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사모를 와해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법관들이 외부에 개설한 ‘이판사판야단법석’ 카페에 대한 폐쇄를 추진한 것으로 조사됐다.

2017년 2월 이탄희 당시 판사가 법원 내 블랙리스트 존재를 알리며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된 사법농단 파동은 2년 만에 사법권의 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의 기소로 마무리됐다. 이제 사법농단 의혹의 유무죄를 가리고 단죄를 내리는 일은 양 전 대법원장이 42년간 재직한 친정인 사법부의 몫으로 남겨졌다. 재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의 이런 혐의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사법부 수장이 스스로 재판의 독립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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